저녁을 기다리는 노을의 맛
고향 동네는 바닷가다.
어릴 때는 작은 모래사장처럼 보였던 해수욕장과 울퉁불퉁한 바위밖에 없던 곳에 지금은 해안선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주변에 많은 음식점과 호텔이 생겨났다. 바닷가로 걸어 나가다 보면 카페가 하나 있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주말이면 토요일에 점심을 먹고 책과 패드를 들고 가서 오후 시간을 보내곤 한다. 바로 해안변에 위치해 있는 것도 아닌 이 카페에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여기저기 독특한 컨셉을 갖고 생겨나는 카페가 많기 때문에 딱 떠오르는 특징은 없지만 몇 가지 내 취향인 것들이 있다.
강배전으로 직접 볶은 커피를 수십 년간 커피를 만든 카페 주인이 직접 내려주는데, 이곳의 바리스타가 만든 커피는 그의 검수를 거친다. 요즘에도 종종 내가 시킨 커피가 한 번에 통과가 못돼서 다시 만들어져 나오곤 한다. 커피맛을 모르는 나로서는 맛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늘 일정한 질의 커피를 마시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 계기였고, 지금은 막연하게나마 이곳 커피에서 얻을 수 있는 특유의 향기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초단기 임대사업이라 불리는 한국의 카페 문화에 편승하지 않고, 넓은 공간에 좌석을 띄엄띄엄 배치해놓았다. 옆사람이 크게 떠들지만 않는다면 나와 동행인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면 외부의 소음도 거의 사라진다. 테이블당 잡지 거치대도 하나씩 비치되어 있지만 주인의 바람과는 달리 이곳에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가끔 음악을 듣지도 않으면서 이어폰을 낀 채 책을 읽는 경우가 있는데, 본의 아니게 옆자리에 앉은 일행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디서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비슷하고, 저마다의 고민과 서로를 향해 내색하는 애정의 방식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해안가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전면부가 바로 앞 고층 아파트에 막혀 이렇다 할 뷰는 없다. 다만 내가 자주 앉는 2층 창가에서 건물 사이로 나무가 흔들리고 잔잔한 파도가 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고의 회로가 느려져 많은 잡념을 덜어낼 수 있다. 스피커가 가까운 자리라서 흘러나오는 소프트 재즈에 정신이 노곤노곤해지긴 하지만.
카페 옆에는 슈퍼마켓이 하나 있다. 부모님 댁이 조금 외진 곳에 있어 근처에 식료품점이 없는데, 카페에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간단한 찬거리나 식료품을 살 수 있다. 하루는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 토마토소스를 찾았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오늘 그 소스 찾는 사람만 세 번째라고 한다. 어디선가 방송을 탄 게 아니냐며 아주머니는 아이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싱글벙글 웃었다. 카페에 오는 날엔 보통 이곳에서 시장을 봐서 어머니와 그 날 저녁 요리를 한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서 카페를 나서야 하는 지금쯤이면 자연스럽게 책을 덮고 저녁 뭐 먹지- 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하늘에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느긋함과 게으름이 깃든 토요일 저녁, 모두가 행복한 식탁에 앉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