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dyton Jul 02. 2019

비 온 뒤, 산

등반하지 않는 산이 주는 위안










전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긴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작년과 같이 질긴 더위를 예고하는 첫 장맛비였다. 땅은 축축하고 공기는 눅눅했다. 고르지 못한 흙길 군데군데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초입에서는 젖은 길을 조심스러워하다가도 찰흙같이 변한 땅에 발을 디디면 '찰박'하고 느껴지는 폭신함에 이내 물웅덩이를 찾는 수고로움은 저만치 달아나버린다. 온몸에 스며드는 작은 물방울의 습격으로 지구의 핵을 향해 끌어당겨지는 듯한 여분의 중력이 더해진 기분. 그러나 나쁘지 않다.


길은 계곡을 따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수명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곧게, 또 구불구불하게 뻗어나간 나무의 줄기처럼 길도 골짜기를 넘고 능선을 따라 오를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만난 갈래길에서 표지판을 보고서야 각각의 길이 각각의 그곳에 이르겠거니 한다. 몇 번 다른 길로 들어선 적은 있지만 모든 길을 다 걸어본 적은 없다. 산을 오르다 계곡물이 깊어지는 곳에서 잠시 쉬다가 내가 가지 않은 길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또각또각 걷는 목각인형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곳에서만큼은 굳이 가지 않은 길 너머를 향한 무의미한 상상을 발동시키고 싶지 않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늘 플랜B를 준비해두어야 하는 강박을 떨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큰 동요 없이 한없이 평온할 때나, 숱한 생각으로 지쳐있을 때나 산속의 고요가 고민 자체를 줄여주진 않았다. 그것은 지나친 기대이다. 생각을 덜어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그저 방해받지 않을 공간과 시간을 열어줄 뿐이다. 오래된 영화 속 장면 중에 계곡 아래에서 가부좌를 튼 채 맨몸으로 떨어지는 물을 맞고 '득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 정도의 의지와 체력을 가진 이라면 애써 산속까지 와서 번뇌를 덜어낼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말이다. 매번 같은 산을 가도 길은 늘 달라 보인다.


등산복을 입지 않는다.

산을 오르는 데에 정상을 정복하는 쾌감이나 긴 도보 여정을 완수하는 성취감 같은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이 거기 있어서-라는 낭만적인 이유를 대기에도 좀 멋쩍다. 만성적인 운동 부족에 시달리는 사무직 노동자의 빈약한 근력과 평균치에 겨우 닿는 폐활량만으로도 산이 주는 넉넉함을 누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값비싼 마케팅으로 잘 포장된 아웃도어 장비는 잠시 오솔길을 산책하기 위해 산을 들리는 나 같은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현란한 물건이다. 편한 옷과 보통의 운동화로 걷지 못할 길은 없다. 언제라도 멈추고 어디서라도 되돌아 내려오면 되니까. 호흡을 고른 후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는 법만 알면 된다.


사진기는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거추장스럽다.

자꾸만 나무줄기에 걸리는 렌즈가 신경이 쓰여서 뱀고사리의 어린잎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만져보는 것도, 수줍게 핀 야생화에 눈길을 주는 것도 잊게 된다. 산이 들려주는 목소리만 듣고 오고 싶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다람쥐의 보드라운 꼬리가 풀잎을 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게 된다. 골짜기 너머에서 흙내음을 싣고 오는 바람과 계곡의 세찬 물살이 바위를 부딪혀 만들어내는 바람의 온도가 다른 것도 알게 된다. 빗방울이 채 마르지 않은 나뭇잎 위 민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진득한 흔적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오늘 또 산을 내려오면서 더 작고 가벼운 카메라를 하나 들이면 어떨까 하고 욕심을 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돌아서다가도 어느샌가 걸음을 멈춰 세우는 풍경을 담고 싶어서 다시 사진기를 챙겨 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눈이 보는 만큼, 마음이 기억하는 만큼 다 담지도 못하면서.



*울산 울주군 간월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