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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Oct 23. 2024

낮에는 사람의자 밤에는 고양이의자

의자는 쉼입니다

며칠 만에 화창한 날을 만난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지만 바람은 차갑다기보단 상쾌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사나흘 비를 먹어 그런지 텃밭의 초록 배추들도 유독 풍성해 보인다. 벌어진 문틈과 군데군데 바람구멍으로 시린 몸이긴 해도 벌린 팔을 오므리기 시작하며 비상하고 있다.  

긴 더위에 시달렸던 백합대는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까지 푸른 옷을 벗지 못했고 산딸나무는 투박하고 거친 제 나름의 단풍옷으로 이미 갈아입었다. 배롱나무 작은 이파리들은 정원 여기저기서 자유로이 발롱거리며 바람운율에 맞춰 발레를 즐긴다.

이름도 한번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좀작살나무의 보랏빛 고고한 열매는 가을이 왕족의 계절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한껏 우아한 빛을 품어내고 있다. 마치 이 보랏빛이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 계절이었겠느냐를 자랑이라도 하듯... 발아래 꽃향유들도 질세라 보랏빛꽃들을 덧붙이고 있다.

정원의 온갖 식물들은 다가올 계절을 맞을 채비에 땀 흘릴 새도 없이 바쁜 것 같다.

살며시 의자라도 놔주며 "쉬엄쉬엄 들 하세요~" 정답게 말이라도 붙이고 싶다.


우리 집 작은 정원엔 유독 의자가 많다.

정원을 가꾸다 아무 데서라도 앉아 잠시 쉴 수 있기 위해서 기도 하지만 여백을 두고 싶은 나름의 철학도 담고 있어서다. 앞마당 플라밍고와 서부해당화 나무숲사이엔 주물장의자를 놓아 꽃밭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살짝살짝 햇살이 뚫고 오긴 해도 뜨거운 여름철에도 나무그늘에서 잠시라도 쉬며 꽃을 볼 수 있다. 구름멍과 하늘멍을 하기에도 좋다.

햇살이 가림도 없이 과감히 내려 쏟는 데크에도 의자를 배치해 두었다. 아침저녁으로 데크를 돌면서 시작하는 곳과 중간 그리고 끝부분의 의자를 만난다. 잘 앉는 곳은 아니지만 걸을 때마다 앉아있는 모습도 그려본다. 앞으로만 걸어온 길을 돌아도 보며 어느 날 어느 곳에 있을지도 모를 낯선 누군가와도 함께 쉴 수 있는 의미를 의자들은 내게 건넨다. 걸어가야 할 긴 인생길, "너도 한번 내가 되어보라"며 권하기도 한다.


함께 쉬는 공간 가제보아래 의자는 주말에 주로 앉지만, 이른 아침과 저녁에도 가끔씩 차를 마시며 온갖 생명이 다정한 정원과 막힘없는 하늘과 산들의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는 곳이기에 조금 더 친한 친구 같다. 친구사이에 더하고 덜하고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강아지 셋도 산책 후에 앉아 쉴 수 있는 곳인 것을 알기에 좋아한다.

하지만 두어해 전부터 이곳에도 변화가 생겼다. 앞 쪽 가제보 아래는 고양이 쉼터가 되고 말았다. 고양이 집을 따로 해줬지만 햇살 좋은 날엔 배를 깔고 쉬며 식사도 한다. 사람들이 앉는 테이블과 의자가 옆에 있지만 우리 강냥이들은 이미 사람들과 친숙해진지라 지인들이 방문하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발밑에서 만져달라고 야옹거리며 사람모임에 끼어든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별이는 의자 위에 앉아 "야옹야옹" 밥 달라며 아침인사를 한다.

깔끔 떠는 인간은 앉기 전에 자리를 닦지만 이미 사람들만이 쉬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랬구나 밤엔 너희들 담소자리였구나~"

밤중이면 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른다.

저녁 운동 후 아쉬워하는 삼냥이들에게 "안녕 잘 자"하고 들어오지만, 아마도 이 아이들은 이때부터 제 할 일들을 하는지도 모른다. 한참 열일한 후, "얘들아 모여봐 ~" 하며 의자에 둘러앉아 하루를 정답게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지도 모른다. 솜이는 든든하게 아빠노릇을 잘했으며 별이와 호프 그리고 훌쩍 자란 앵두는 재밌고 아슬아슬했던 사냥경험을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유난히도 커다랗고 밝은 달빛이 감싸주는 밤엔 어딘지도 모르게 떠나버린 엄마 삼색이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이웃 길냥이들까지 배석해  동네 소식을 주고받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면 어린 삼냥이들을 귀를 쫑긋거리며 재밌어했을 것 같다.

"그래 의자가 어찌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겠니... 모두에게 쉼을 주는 궁극의 목적을 너희에게도 나눠줬구나"

우리 집 의자는 낮에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고 밤이면 바람도 쉬어가고 휘영청 달님도 잠시 앉아 고양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정원 사랑방이다.


나이 든 강아지 셋을 산책시킨 후 가제보아래 장의자에 앉힌 후 잠시 쉰다. 눈치 없이 가라 해도 가지 않는 삼냥이들을 보며 샐리와 보리는 쉴 새 없이 짖어댄다.

"저리 가 ~ 잠시라도 저리 가 있어 ~"

흥분하는 강아지를 막으며 긴 막대기로 고양이들을 밀어낸다.

삼냥이들은 멀리 가면서도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곁에 앉겠다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서 함께 하겠다는 것뿐인데..." 강아지와 고양이가 다정히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풍경도 그려보지만 아직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지금이 쉬어가는 때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지만 대지의 사계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할 수 있었기에 자연이 허락한 거슬리지 않는 조촐한 초목이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삼냥이와 솜이에게 잠시 쉬어가게 자리를 내준 소박한 의자가 되어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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