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솜이는 살이 더 찐 것 같고 벌써 10개월이 돼 가는 삼냥이들도 잘 자라 "다 컸네~" 소리가 나올 정도다.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지만 유독 앵두는 집냥이처럼 식구들을 잘 따르고 집에 많이 있는 편이다.
이제는 떠나버린 삼색이가 감기가 심해 아기들을 잘 돌보지 않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올 초,불린 사료와 함께 영양 보충을 위해 고양이 전용 우유를 한 달 이상 먹였던 것 같다. 10ml 주사기에 우유를 넣고 무릎에 앉혀 하루에도 몇 번씩 먹였는데 별이와 호프는 앙탈 부리며잘 먹지 않았다. 다행히 앵두는 흘려가면서도 한 모금씩 받아먹곤 했다. 태어날 때는 제일 작고 시원찮아 보였던 앵두가 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앵두보다 훨씬 덩치가 컸던 자몽이 와 티코가 오히려 먼저 떠났다) 살려는 의지가 있어서였던지 잘 먹었고 이제는 호프보다 무거울 정도다. 앵두는 한쪽 눈도 시원찮아 눈약을 계속 넣어주며 치료를 했다. 나아진 후에도 날이 안 좋으면 다시 눈물이 나고 상태가 안 좋아진다. 겨울에 되면서 조금씩 안 좋아지는 것 같아 약을 넣고 치료해 주며 관찰한다. 잘 먹으니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호프와 별이는 하얗고 예쁘게 생겨 이웃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편인데(?) 앵두는 흔한 옷을 입은 데다 하필 얼굴 중앙에 조로처럼 검은 안경을 써 인상이 곱게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강한 인상 탓일까? 셋 중에서도 사람을 가리는 편이니 흰둥이 녀석들보단 인기가 덜하다. 그래도 이 녀석이 예쁜 것은 유독 잘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침에 문을 열면 제일 먼저 "야옹"하며 인사하고 들러붙는 아이다. 마당에서 뭐라도 하고 있으면 어느새 곁에 와선 비비며 만져달라 애교를 부린다.
저녁에 산책할 땐 제 기분 내킬 면 곁에서 함께 걷기도 한다. 강아지들은 주인과 함께 걷기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들은 홀짝거리며 앞질러 뛰어가 기다린다. 갔나 싶으면 어느새 옆에서 깡충거리고 있다. 한 바퀴 돌 다 한 번씩 쓰다듬어주면 배를 드러내고 아예 눕는다. 산책하고 난 후 의자에 앉아 쉴 때면 어느새 달려와선 품으로 파고 들어온다.내려가라 해도막무가내다. 좋다고 파고드니 결국 안고 쓰다듬어 주게 된다.
젖병을 물고 품 안으로 들어왔던 그때를 기억하고 제 나름대로 애정표현이라도 하는 듯 안기니 더 마음이 가고 챙기게 되는 것 같다.
앵두에겐 고양이기질보다 강냥이 기질이 더 많은 듯하다.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하는 이유가 뭘까? 주인을 잘 따르고 주인의 스타일대로 기르기 쉬워서일까? 개는 원천적으로 처음에 본 사람들을 잘 따르게 되어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라지만, 키우는 사람들은 이 말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충실하기 이전에 먼저 주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돌봐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기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과감하게 자신의 감정 표현을 하면서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강아지라면 강아지보다 조금 더 독립적인 고양이는 애정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양이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애정 표현을 잘한다는 것을 몇 해 길냥이를 거두면서 알게 되었다. 물론 인생사가 그렇듯이 "먼저" 손을 내밀어 사랑해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지만...
좋아하는 것들과의 모든 관계는 정情이다. 스스로를 엮고 있는 모든 것들은 물론, 인간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반려견, 반려묘와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 속에 살아있는 모든 생물과의 교감도 情에서 비롯된다. 겨울옷 다소곳이 입고 조용히 잠자고 있는 나무들, 정원 한 귀퉁이 자리 잡고 있는 묵묵한 돌하나까지도 어제 본모습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정情이다. 비록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같은 세상, "지금"이라는 같은 현실에서 따뜻 한 온기를 품고 살아야 하는 생명체의 교감이라고나 할까?
"살아있노라"며 매섭게 달려드는 겨울바람조차 사실은 속 마음의 훈훈함을 꼬집어 내어 넘겨주는초겨울의 친구임을, 사방에서 함께 하는 정情으로 느끼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