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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야 이해되는 초록빛 바닷물...

by opera

몇 달 만에 데크 길을 걸으니 강가는 온통 풀밭이다. 물옆이라 그런가, 유독 장대 풀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멀리서 바라봐도 이런데, 가까이서 본다면 하늘 찾아 미아 될 듯한 장대숲이다. 나무도 아닌 것들이 나무인 양 아니 나무라도 된 듯, 보고 싶어 목 빼고 기다려 그런가 묻고 싶다. 찾아오는 친구를 반기려 단장했다지만 누렇게 떠 가는 처량한 몰골들로도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산과 동무하여 앞을 향해 흐르는 강 물길엔 돌 용까지 초록빛 강물을 딛고서 비상하고 있다. 혹독했던 여름철 그늘로 몸 바쳐 봉사했던 데크옆 굵은 단풍나무는, 채색옷으로 갈아입으며 하나둘 가을 반기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수수하고 겸손하게 여름을 지켜왔던 청단풍들까지 화려하게 갈아입기 위한 차비를 하고 있는 가을 아침이다.

올여름 얼마나 더웠던가. 해마다 작년보다 더 더웠던 여름, 이상기후는 자연의 손상과 파괴를 대가로 주지만, 이젠 이상기후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당당히 건강하지 못하게 나이 들어가는 지구의 모습은 우리네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그래도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정경 속의 아이들은 자기들 몫을 충분히 해냈다. 올여름 우리가 버텨온 것 이상, 버티면서도 준비까지 해 온 것이다. 본때 없는 큰 키로 숲을 이룬 풀밭조차, 초록 강물과 조화롭게 온통 푸르른 자연색을 칠하는데 일조했다.


우리나라 산하가 초록으로 물드는 이유, 청량하게 아름다워 보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출신이 명확한 나무나 꽃들의 활약도 있지만, 출신조차 알기 어려운 이런 아이들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종류도 다양한 풀, 잡초들은 각자의 난바대로 주변환경에 알맞게 빈 곳을 채워준다. 초록 물감으로 적당히 변신해 산과 강과 언덕의 빈 곳을 색칠해 간다.

알프스 산자락, 양들이 사는 곳에 이렇게 키 큰 아이들이 많으면 양들이 먹고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바람도 억센, 그곳의 풀들은 생명을 위해 나지막하고 보드랍게 자라는 아이들로 변모해 왔는지도 모른다. 산짐승들이 많지 않은 강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홍수라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걸맞게 키 큰 풀들로 자라주어 나름 강풀로 어울리게 된 것처럼...

자연의 특성은 나보다 너를 먼저 생각하는 데 있으며, 어떠한 재해를 입어도 결국엔 너를 위한 제자리로 귀결되기 마련임을 알려주려는 사랑의 퍼포먼스로 가득한 아침 풍경이다.

자연은 어쩌면 이렇게도 필요에 따라 적절한 삶을 꾸려가도록 만들어주며, 언제 찾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어울려 버텨가며 기다리고 있는지... 고맙기만 하다.

이렇게 걷다 보면 인간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 소중한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소홀하게 여겨지기 쉬운 것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것들, 주변에 널린 아이들이 꾸려가는 황홀한 자연의 무리 속 일원인 것에 대한...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자연 속의 산책이 있는 지금, 놓쳐서는 안 될 순간이다


문득 입가로 흘러나오는 허밍소리, 초록빛 바닷물에 ~~ 오늘 아침에야 초록빛 바닷물을 이해할 것 같았다.

예전 그땐 바닷물은 파란 것 같은데 왜 초록빛이 먼저 나올까 했더랬다. 언젠가 아드리아해의 짙푸른 초록 바다를 보긴 했었지만, 초록빛 바닷물 노래가 떠오르진 않았었다.

뜬금없이 나의 고향이 초록빛 바닥물에 둘러싸인 섬이란 것이 자랑스럽다. 고향은 항상 나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중화시키며 함께 가야 한다고 늘 알려주었다. 하지만 밀물처럼 썰물처럼 긴 시간 들락날락한 후에서야 나도 결국은 초록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내 옆에 있던 파랑과 빨강과 무채색의 많은 이웃들도 결국은 초록으로 함께 가야 함을 알게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서 감사하다.

왜 파아란 바닷물이 아니라 초록빛 바닷물이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산을 품고 흘러온 강을 품은 바다가 자연의 모든 친구를 담고 동화되고 녹여 들여, 처음 제 색을 버리고 초록으로 융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함께 가기 힘든 세상, 그래도 한발 한발 나아가기 위해선, 어우러져 품어 제 색조차 비꿔버린 자연의 여유와 나눔의 색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풀들이 산하를 채워가며 하나의 초록으로 돋보이게 해 주듯, 묵묵히 제자리에서 표 나지 않는 한 걸음씩 내디디며 오늘을 엮어가는 많은 너와 나, 결국의 우리들이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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