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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 개발자 May 15. 2024

삶은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기에 불안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히리 프롬

진부한 발언이지만 최근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난 300년간 인류는 수천 년간 이어져온 왕정을 폐지했고 계급 제도를 없앴으며 인종과 성별에 제한 없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여전히 자유를 위한 투쟁이 진행 중이지만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에선 역사 그 어느 시점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수백 년간 목숨을 걸며 쟁취한 자유는 당연히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가치라고 생각해봄직 하다. 그런데 정말 자유를 위해 싸워 오면서 우리는 행복해졌을까? 괜한 딴지를 거는 생각일 수 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이자 사상가인 에리히 프롬은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프롬은 오히려 자유 때문에 우리가 더 불행해졌다고 주장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수백 년간의 투쟁의 결과가 불행이라니.



프롬의 의견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교과서든 대중매체에서든 암묵적으로 중세시대를 암흑기로 묘사한다. 서로마 멸망부터 르네상스 사이 천년정도의 시간 동안 당시 사람들은 단순하게 말해서 기독교 킹왕짱을 외치며 살아왔다. 오로지 신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니 중세 시대에는 대단한 발명품도 없고 역사 속에 기억에 남을 예술이나 문화도 특별히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농노로 태어났다면 계속 농노로만 살아야 했고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쭉 귀족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다행이었지만 농노로 태어났다면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죽을 운명이다.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흙수저라도 노력하면 꿈이라도 꿔볼 수 있는 요즘 시대엔 당시 사람들은 꿈과 희망이 없었던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러나 프롬은 당시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스템상에선 신분 상승 루트가 없었지만 내부 구성원들이 그럴 엄두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신분은 신이 부여했다고 믿었다. 농노로 태어난 건 신이 정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농노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신을 믿고 농노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일하게 평생 농노로 살아갈 처지였다. 그래서 집단 내의 사람들에게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요즘 시대에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런데 자유가 주어지면서 세상은 변했다. 계층 사이에 사다리가 생겼다. 이제는 가난하게 태어났어도 노력여하에 따라 사다리를 타고 신분이 상승할 수 있게 됐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동시에 내려가는 사람도 생겼다. 경쟁에서 뒤쳐지는 경우 자산을 잃거나 암묵적인 신분이 내려갈 수 있는 사람도 생겼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경쟁이 생겼다. 학교에선 친구들과 점수를 두고 경쟁하고 회사에선 성과를 놓고 팀원들과 경쟁한다. 과거 농노들이 느꼈던 따뜻한 소속감과 안정감은 없어졌고 그 자리엔 불안감과 고독이 채워졌다.


과거에는 모든 운명을 신의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결과는 나의 누적된 행동의 결과다. 나의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나의 선택의 결과다. 마흔 살에도 자가 마련을 못한 것은 내가 투자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불안한 위치에 있는 것은 당신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줬지만 동시에 책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앞에 놓인 무한한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더없이 고독해지고 차가운 결과 앞에선 무력감을 느낀다. 


삶은 가능성으로 차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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