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무신
검정고무신
- 이우영 작가를 기리며
번들거리며
닳아버린 앞코의 운명으로
누군가의 걸음을
따뜻하게 받쳐주고 싶었던 사람은,
눈부신 영웅 하나 없이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던 아이들의 발에
자갈 많은 운동장에서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추억을 신겨주던 그 사람은,
별이 되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흙빛으로 소박하게 포개져
마음 한 켤레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여기,
당신이 그려 둔 작은 발자국 위로
수많은 이름 없는 우리들이
여전히 가슴속 골목을
걸어 다닙니다.
맨발이 된 지금도
가끔 그 신발이 그리워,
당신이 그려 준 따뜻함을
발끝으로 살아보려합니다.
묘비도 모른 채
마음속 언덕 하나를 골라,
그 앞에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조심스레 내려놓습니다.
당신이 벗어 둔 신발처럼
당신도 잠시 쉬러 떠났을 뿐,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만든 길이
아직 여기 남아있어
우리는 여전히
먼지 이는 골목 끝에
서 있습니다.
사 년째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맨발로 대지 위에 서는 순간, 나는 조금 작아지고, 대지는 조금 더 커진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흙의 온도가 발바닥으로 스며들고,
풀잎 하나, 자잘한 자갈 하나가 나를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내가 땅을 딛고 걷는다.'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대지가 매 걸음마다 나를 받아 안아 주고 있었다.
쓰다듬듯 밀어 올려 주는 흙과 낙엽의 힘에 이끌려 걷다 보면 어느새 굳어 있던 마음도 조금씩 풀려 고운 흙처럼 포슬포슬해진다.
맨발이 되기 위해 벗어던진 검정신발,
어릴 적 검정고무신에 가까운 흙 묻은 신발을 보면 오래전 풍경이 겹쳐온다.
댓돌 위에 늘 하얗게 빛나던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도 생각나고, 물놀이할 때만 꿰어 신던 검정고무신도 생각난다.
산업화의 한가운데, 고무신과 운동화 사이를 오가던 끼인 세대.
학교 갈 때는 운동화를 신었지만 집에 돌아와 골목으로 나설 때는 검정고무신에 발을 밀어 넣던 시간들.
내가 흙 위에 벗어던진 검정신을 볼 때마다 가슴 아픈 ‘검정고무신’ 하나가 마음 끝에 매달려 떠나지 않았다.
60~70년대 골목의 공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채집하듯 그려 넣은 ‘검정고무신’의 만화가 이우영 작가는 2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좁은 골목, 허름한 판잣집, 귤박스, 국민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보통 사람들, 보통 가족의 이야기가 서민들의 애환을 품고 가난하지만 정 많고, 거칠지만 따뜻한 시대의 공기를 보여주었던 만화를 그렸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 한 구석에 따뜻한 자신의 삶을 심어 놓고 떠난 사람.
가난했지만 다 같이 모여 웃을 수 있었던 시간,
허기가 졌지만 결국 밥상 앞에서 화해하던 저녁,
검정 고무신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눈부신지를 조용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만화여서 어린 시절 추억을 더듬고 싶은 어른들도 작가의 작품을 보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만화를 그리던 이우영 작가는 네 해가 넘는 소송과
어이없는 도용 시비 끝에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언니는 초등교사였다.
명퇴를 한 이후에도 갑작스러운 학교의 요청을 받으면 며칠씩 강사로 학교에 나가서 가르친다.
언니 얘기를 들어보면 그 옛날 그러니까 90년대에 인기 있던 만화 ‘검정고무신’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다들 좋아하고 다음 편을 보여달라고 조른다고 한다.
옛날 골목 풍경이지만, 아이들이 겪는 고민과 웃음이 지금 아이들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 친구와 싸우고 화해하고, 형제끼리 토닥거리다가도 결국 밥상 앞에서 웃게 되는 장면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리라.
반짝거리는 히어로 대신, 검정고무신 신고 뛰노는 평범한 아이가 주인공이라서 소박한 유머와 자잘한 감동으로 어른은 추억으로,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로 함께 즐길 수 있는 소중한 만화.
그래서 90년대의 만화인데도, 세대와 시대를 건너 여전히 ‘지금 아이들’의 공감을 불러냈던 것이리라.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창작한 캐릭터를 쓰면 도용이라고 고소당하는 어이없는 상황과 4년의 넘는 소송에 휘말려 세상을 떠난 작가는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연필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작가가 수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 한 구석에 자신의 따뜻한 삶을 심어 놓고 떠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늘
미안하고 고맙고 아쉬운 마음으로 작가의 무덤가에 조용히 ‘검정고무신’을 내려놓는다.
검정고무신 작가는 왜 세상을 등졌나
입력 2023.04.14 06:41 호수 812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053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이우영 작가가 지난 3월 11일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51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인은 〈검정고무신〉 저작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으로 오랜 기간 힘들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이틀 전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가 작가의 마지막 메시지가 되었다. “〈검정고무신〉은 제 인생 전부이자 생명입니다. 창작 이외에는 바보스러울 만치 어리석은 창작자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4년 가까이 소송을 벌이던 이우영 작가는 1심 판결이 나오기 전에 생을 마감했다.
- 기사 중 일부
"죽어야 이슈 될까" 검정고무신 작가 죽음 내몬 저작권 분쟁
중앙일보
입력 2023.03.14 05:01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46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