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씨 2
풀씨 2
내 장례는 이미 치러졌다.
꽃이 지던 날,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은 꽃다발을 두고 떠나지만
나는 꽃다발이 되기 위해 떠난다.
그러나 이상하지.
모든 것이 멈춘 이 순간이
슬퍼했던 모든 일이
그냥 그렇게
한없이 아름답게 여겨지니,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린 길 위를
잠시 스쳐 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아.
갈길이 멀어
등 뒤로 지는 해가 서글퍼서
눈물 흘렸다 생각하지 말길,
헤어지는 일이 뭐 그리 대수랴.
숨겨도 숨길 수 없었던 사연들.
꼼짝없이 사랑에 붙들려 본 적이 왜 없었으랴.
다시 못 올 그리움이 왜 없었으랴.
드문드문 외로울 때가 왜 없었으랴.
세상이 기억하지 못하는
너의 수많은 떨림이
어디선가 어느 낯선 이의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 수 있다면,
무심히
떠나는 이 길도 나쁘지 않다.
마지막 흔들림으로
그곳으로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개가 많은 도시였다.
대학시절. 문학 동인회 활동을 하면서 사시사철 안개 낀 호수와 강가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왜 그렇게 다들 외로워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고인이 되신 이외수씨도 고문으로 간혹 자리를 함께하곤 했었는데 알려진 대로 기인이시다.
문학에 취하고 술에 취한 상태가 되면 부르는 우리의 주제가가 있었는데 ‘풀꽃. 술잔. 나비’라는 이외수씨 시였다.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그 노래를 목청껏 부르다가 한 명이 울기 시작하면 따라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울었다.
아니 노랫가락이 서글퍼서 가사가 외로워서 울었다.
노래를 마치면 말도 안 되는 문학논쟁으로 싸움질을 하다가 다시 술 한 잔을 마시고 또 이 노래를 부르며 울었다.
누가 작곡한 것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유튜브에 찾아보니 있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우리가 부르던 노래와는 전혀 결이 다른 노래였다.
얼핏 이외수씨가 직접 작곡했다고 들었던 듯하다. 늘 기타를 치시곤 했었으니....
노랫가락이 아주 슬퍼서 부르다 보면 저절로 울컥해지고 눈물이 솟구쳤다.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외로움과 그리움은 그 총량에 제한이 없는 듯하다.
젊어서 그 외로움과 그리움을 많이 느껴본 사람이 그 감정을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치기 어린 젊은 날 쓰던 시와 전혀 다른 결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느꼈던 그리움과 외로움이 자꾸 솟아나고 있다.
더 깊이 외로움을 느끼고
익어가는 그리움을 길어 올리는 중이다.
풀꽃. 술잔. 나비
이 외 수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 마음 여기 홀로 술 한 잔을 마신다.
이 나라 어두움을 모두 마신다.
나는 나는 이 깊은 겨울
한 마리 벌레처럼 잠을 자면서
어느 봄날 은혜의 날개를 달고
한 마리 나비 되는 꿈을 꾸면서
아 밤을 돌아앉아 촛불을 켠다.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 마음 여기 홀로 술을 마신다.
풀씨를 바라보다 문득 우리 삶도 어느 날,
저렇게 불쑥 바람에 실려 흩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를 쓰며 내 삶의 장례를 미리 치러 본 셈이다. 그래서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은 여기까지 함께 와 주어서 고맙다고 조용히 놓아주고 싶었다.
꽃이 지는 순간이 가장 고요하게 아름답듯, 끝이라는 말은 늘 상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깨에 세월이 내려앉으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허무는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어서 이제는 그 옆에 나란히 서 보려 했다. 그 옆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얼굴들이 있다. 사랑했던 시간들, 품고도 다 말하지 못한 그리움들, 기어이 견뎌낸 외로움들, 언젠가 다시 싹틀지도 모를 작은 떨림들.
상실의 상흔보다 한때 분명히 존재했었던 것들의 찬란함을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흘렸던 눈물, 품었던 사랑, 견뎌낸 외로움. 그 모든 떨림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닿아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이 덧없는 여정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풀씨처럼 가벼이 떠나되, 언젠가 뿌리내릴 곳을 향한 희망하나쯤은 품고.
헤어짐이 슬픔만은 아니기를.
우리 모두 언젠가 바람이 되어 서로를 스쳐가는 나그네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러면 이 흩어짐도 이미 충분했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