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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풀씨

by 보리

풀씨



이제는

내가 지닌 전부를 덜어내고

조금 가볍게 살아보려 한다.



바람은

말 없이 나를 들어 올려

낯선 길 위에 내려놓고,



사랑이 시작되던 그 봄날,

네 얼굴에도 이미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듯이.



그러니 울지 말고 손 흔들라.



하고 싶었으나 끝내 삼켜버린 말,

닿고 싶었으나 안지 못한 어깨,

돌아보고 싶었으나 끝내 외면한 길들로

가슴 한쪽이 시큰거리는 밤들이.



네가 포기한 꿈 하나,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기억 하나,

끝내 떠나보낸 사람 하나가

조용히 가슴에 눌어붙어

작은 풀씨처럼 떨고 있을 것이다.



네 오래된 한숨을

살짝 쓰다듬어주고 간다면,

그걸로 됐다.


풀씨.jpg 너무 예쁘지만 가을이 몸에 붙은 풀씨만 보세요.




풀씨가 따라와 전하는 말



가을이 시작되면서 새벽 산책길에 사랑하는 반려견 땅콩이와 가을이가 날마다 풀씨를 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엽고, 징그럽고, 안쓰러운 풀씨를 바라보다가 처음에는 '잡았다. 범인'하며 유레카를 외쳤다.


봄이 되면 수없이 잡초가 자라나는 잔디밭을 만드는 '주범 풀씨'를 검거해서 뿌듯했다.


그러나 가을 내내

땅콩이와 가을이가 달고 온 풀씨는 집안까지 따라 들어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풀씨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자꾸 마음으로 건너왔다.


내 안에 남아 있던 수많은 미련들과 눈 맞추게 되고, 끝내 건네지 못한 말들, 돌아설 수밖에 없던 순간들이 풀씨의 몸을 빌려 다시 내 앞에 서는 것 같았다.


눈부신 성취 대신, 그저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딘 마음에게 처음으로 작게 박수 치고 싶었다. ‘그걸로 됐다.’는 남에게 하는 위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다.


더 잘 살지 못한 날들을 용서하고, 그럼에도 살아낸 날들을 안아주고 싶은 조용한 악수 같은 말. 풀씨는 그래서 작지만 단단한 내 편이 되었다.


풀씨는 어쩌면 지금의 자신을 버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또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누구나 가슴 한쪽에는 말라붙은 꿈 하나, 미안함이 눌어붙은 기억 하나쯤은 품고 살아갈 터이니 내가 그 무게를 완전히 덜어주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무게를 ‘쓸모없는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오래된 한숨도 누군가의 삶을 지탱한 숨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풀씨는 삶을 화려하게 바꾸려는 주문이 아니라, 이미 잘 버텨온 우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되기를 바란다.


가을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다고 고개 끄덕이는 작은 인사를 나눈다.


풀씨4.jpg 예쁜 얼굴 물려준 가을이 엄마 땅콩이 몸에 붙은 풀씨만 보세요.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풀씨 하나를 위하여, 정하선

풀씨 하나를 위하여 - 정하선


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저 작은

풀씨 하나를

흙에다 떨어뜨려놓고

신은 매일매일 아침마다

이슬 내려

맑은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태헌의 한역]


爲一草子(위일초자)


猗歟此何非所重(의여차하비소중)

落地彼小一草子(낙지피소일초자)

天神日日待朝旦(천신일일대조단)

手降露珠祈淸祉(수강로주기청지)


자료출처 :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5172076Q






댕댕이가 하루 종일 핥는다면…산책길 풀씨 주의보


풀씨5.jpg 가을이 엉덩이 풀씨만 봐주세요.


풀씨6.jpg 두 달을 넘게 이렇게 풀씨를 데려왔으니 우리집 잔디밭은 언제나 잡초들의 천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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