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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어 Nov 19. 2019

기업문화는 무슨...(2)

좀비와 고아들의 회사 : 실패 처리 프로세스가 없으면 펼쳐지는 아비규환

새해가 밝았으니 조직개편을 해야죠. 그렇죠, 제 일이죠. 일 년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시기입니다. 요즘 들어서 하루에 몇 번씩 같은 질문을 받는다니까요?


"○○, 우리 조직개편 언제 해?"


참 신기할 정도로 이 회사 사람들은 조직개편을 좋아합니다. 윗분들만 좋아하시는 게 아니에요. 팀장님들은 조직개편을 명절 기다리듯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조직개편안 작성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치열한 사내정치가 시작되지요.


위로 올라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냐고요? 우리 회사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일정 직급 위로는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곳이거든요. 이 곳에는 영전도 좌천도 존재하지 않아요. 이 분들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야, R&R 나왔냐? □□ 사업 누가 하기로 했냐?"
"그거, 하시던 데서 계속하시면 됩니다."
"야이, 씨!"
"고생하세요, 크크크."


바로 이겁니다. 묵은똥 치우기. 물려받은 똥과 새로 만든 똥을 한데 모아 옆으로 패싱 할 수 있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기회. 이 폭탄 돌리기를 위해 모든 영업부서의 장들은 2주가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정보력과 정치력을 총동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 사업 이제 □□에서 한다며?"
"그래요? 대박! 왜 난 몰랐지?"
"야, 조직개편하는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그러게요? 누가 알까요? 크크크."


루머가 루머를 낳고, 그러다 보면 아직 착수도 안 한 조직개편안의 결과가 이렇게 담당자의 귀에 들어오기도 하는 겁니다. 이러다 보니 조직개편안이 발표되면 늘 뒷말이 나옵니다. 팀장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오는 '누가 누구한테 로비를 했네', '이번 조직개편안은 누구 입김이 들어갔네'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팀장은 팀원에게 뒷말을 전하고, 뒷말을 전해 들은 팀원은 조직개편 실무 담당자인 저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하러 오거든요.


그런가 하면 실무자들은 또 다른 방향에서 조직개편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부서는 올해도 안 없어져요? 그 사업 망한 거 아니었어요?"
"아, 몰라요! 좀비라니까, 그 사업!"


항상 내 일은 힘들고 늘 우리 부서의 예산과 인력은 부족한데, 수익도 못 내고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사업이 그 둘을 쪽쪽 뽑아 가니 불만스러운 거죠.


이 사업은 이런 질문도 자주 받곤 합니다.


"□□사업은 이게 뭐 하는 사업이야? 이전 담당이 어디야?"
"글쎄요...?"
"마! 네가 R&R 짰잖아!"
"거기 없는데요? 고아예요, 그 사업. 팀장님이 입양하실래요?"


(오늘 만든 용어 1.) 좀비 사업
  ☞ 이미 실패가 확인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살아남아 담당조직과 추진 예산을 가져가는 사업
(오늘 만든 용어 2.) 고아 사업
  ☞ 담당부서가 없거나 사업이 파편화되어 부서에 흩어진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사업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고객의 불만 제기나 업무지원 요청을 통해 깜짝 등장하여 CS 담당을 경악
      시키곤 한다.


팀장님들은 조직개편을 좀비 사업과 고아 사업들을 가지고 치는 고스톱 판으로 여깁니다. 실적에 쪼이면 좀비 사업을 다른 부서로 떠넘기고, 부서가 없어질 것 같으면 좀비 사업에 고아 사업들을 엮어 부서를 급조해 냅니다.  타 부서로 떠넘기려고 합니다.


이 아비규환을 겪어 본 신참내기들은 술잔 앞에서 연설들을 하지요. '우리 회사는 기업문화가 이상하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문제일까요?


이 회사가 실패사업을 정리하는 프로세스를 갖추고 잘 운영을 했다면 좀비 사업이 없었을 것이고, 그 프로세스에 따라서 실패사업이 아닌 것들을 추적관리해 왔다면 고아 사업도 없었을 겁니다. 좀비와 고아가 없으면 조직개편을 기다리는 팀장들도 없었을 것이고요.


아무튼 저는 기업문화가 문제라는 윗분들의 지적에 따라 기업문화 개선방안을 보고해야 하니 이만 잡담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워크숍과 캠페인을 몇 개 그려 넣으면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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