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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어 Dec 30. 2018

나, 기획한다?(2)

내가 이론의 위대함을 보여줄게! (5 Force라고 들어 봤지?)

모든 사달은 그냥 넘어가야 할 일을 넘어가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이번 일도 그냥 가만있으면 조용히 지나갈 것을 괜히 나서서 키워 놓은 것이었죠.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스위치가 눌려서 말입니다.


"저런 얘기는 학교 다니는 애들도 할 수 있어. 현실적인 얘기를 해야지!"


얼마 전에 신사업을 한다고 만들어 놓은 부서에서 무슨 회의를 하는지 큰 소리가 오갔고 그걸 사무실 높은 분들 눈을 피해 월급 루팡 짓을 하던 제가 들어버린 것이죠. 그렇다고 저분들이 싸우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하하호호 웃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목소리가 커진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기서 들리는 말들이 좀 신경 줄을 살살 긁더란 말입니다.

 

 "저건 교과서적인 얘기고,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이론적 기초가 없이 현업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들이 이제 막 이론을 배워 나온 꼬마들이나 기획 쪽 사람들이 무슨 의견을 내면 면박을 줄 때 하는 말이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입니다. 기존에 하지 않던 방식을 제안하거나, '당신이 하던 방식은 틀렸다.'는 주장을 던지면 튀어나오는 일종의 방어기제죠. 그리고 그런 발언은 석사학위 보유자인 저의 스위치를 꾸욱 하고 눌러버린단 말입니다.


'어디에 이론과 유리된 현실이 있다는 거야?' 하면서 회의실 유리문의 반투명 부분 위로 빼꼼히 들어다 보는데 아뿔싸, 눈이 마주쳐 버렸습니다.


"저기 기획 있네. 야, ○○, 잠깐 들어와 봐!"


이렇게 불러들이는 것은 저에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존심 강한 현업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기획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저기서 이야기하던 사안이 뭔진 몰라도 우리 팀과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관련성이란 보통 우리가 던진 어젠다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요.


아니나 다를까, 이 분들이 보고 계시는 것은 지난번 제로페이 보고서(링크)였습니다. 우리 꼬마가 '이건 우리도 뛰어들어야 합니다.'라고 결론을 낸 모양인데, 그게 하필이면 저 부서에 숙제로 떨어졌던 것이죠. 그리고 저는 월급 루팡질을 하다가 고개 한 번 뻬꼼 내민 죄로 그 원망을 다 받아내게 된 것이고요.


"야, 이걸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가 있는 거냐? 그리고, 니들이 시장을 알아? 책상머리에 앉아 가지고 이론적인 얘기만 하면서 이런 걸 뚝 떨어뜨리면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니?"


일장 연설을 듣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보고서에 무슨 대단한 이론은 안 들어간 것 같은데',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데', '내가 시킨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이러나' 같은 생각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니까 모든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더군요. '이론이 현실을 못 쫓아간다고? 모르시는 말씀. 내가 이론의 위대함을 보여줄게!'


"아, 이론적으로요? 이런 그림 보신 적 있으시죠?"1)


The 5 Forces Model (M. Poter.)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으냐?'는 반응입니다. 역시 고전은 고전입니다. 누구든 대강은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긴 30년도 더 된 이론이니 회사 좀 다닌다 했으면 한번쯤은 다 접해 봤겠죠.


"잘 아시겠지만 여기서 우리 산업을 놓고 좌우로 있는게 공급자랑 구매자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제로페이 사업에 뛰어든다고 하면, 봐야 하는게 어플 이용자랑 매장이잖아요? 이들은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요?


전통적인 산업분석 모델에 간편결제 산업을 적용하면?


1번 파와 2번 파가 나뉘어 다투는 그 아름다운 현장을 모두가 함께 봤어야 하는데 말이죠. 아쉽게도 그 광경을 목격하는 특권은 저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저도 오래는 못 봤어요. 빨리 답을 주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였거든요.


"정답은 '둘 다 아니다' 입니다. 옛날 이론만 보시니까 현실이랑 안 맞죠. 제로페이는 양면시장이란 말입니다. 그건 이렇게 그려야 하는 거에요."2)


양면시장 개념을 도입한 간편결제 산업분석


사람 얼굴에 딱 쓰여 있다고 하잖아요? 이게 딱 그런 상황입니다. 모두들 얼굴에 '그래서 뭐?'를 써 놓고 있는 상황 말입니다. 하긴 그림만 떡하니 그려 놓고 뭘 알아먹기를 바라는건 과욕이죠. 그림은 이해를 돕는 수단일 뿐이니까요.


"자, 보세요. 양면시장은 어느 한 쪽을 꽉 잡고 있어야 다른 한 쪽의 고객도 확보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렵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로페이가 들어오면 이 문제가 풀린다는 거죠."


□ 간편결제 사업의 특성
   ○ 양면시장의 특성을 가진 플랫폼 사업
       - 앱 이용자 시장과 수납 매장 시장으로 구성
       - 앱 이용자와 수납 매장 간 포지티브 피드백 존재
         * 앱 이용자는 많은 수납 매장을 보유한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함
         * 수납 매장은 많은 앱 이용자를 보유한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함
   ○ 네트워크 외부성과 lock-in effect로 승자독식 시장 형성
       - 앱 이용자와 수납매장은 하나의 플랫폼에 묶임(locked in)
        * 한 플랫폼의 멤버십으로 다른 플랫폼을 이용할 수 없음
       - 앱 이용자 및 수납매장의 플랫폼 이용 효용은 이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 (메트칼프의 법칙)
        * 플랫폼 이용자는 가장 많은 이용자가 있는 플랫폼으로 쏠리게 됨

□ 국내 간편결제 사업의 현황
   ○ 앱 이용자 시장은일정 정도 확대된 상황
      - 카카오페이, 페이코, SSG페이 등 복수 사업자들이 이용자 기반을 확보
      - 토스 등 비 결제 영역 사업자들도 간편결제 시장 진입을 고려 중
   ○ 수납 매장 시장은 개척 초기 단계에 해당
      - 단, 카카오페이는 선발자 우위를 누리는 상황

□ 국내 간편결제 사업 전망 (제로페이 이전)
   ○ 신규 진입자의 사업성공 가능성이 낮은 시장
      - 신규 진입자는 기존 사업자 대비 많은 자원 투입을 강요받는 시장
       * 기존 사업자들은 이미 다수의 앱 이용자를 확보한 상황
       * 신규 진입자는 앱 이용자와 수납 매장을 동시 모집해야 하는 상황
      - 기존 사업자는 네트워크 외부성을 통해 절대적인 경쟁우위를 확보
   ○ 수납매장 모집이 사업 성패의 핵심

□ 제로페이의 영향
   ○ 경쟁의 축을 수납 매장 모집에서 앱 이용자 확보로 이동
      - 참여 사업자들이 수납 매장을 공유하는 구조
      - 수납 매장 풀을 공유함으로써 경쟁 영역이  앱 이용자로 제한3)
   ○ 간편결제 시장 신규 진입자들에게 기회를 제공
      - 앱 이용자와 수납 매장 간 포지티브 피드백 차단
      - 일정 수의 이용자를 확보하면 제로페이 수납매장을 기반으로 사업 가능
        * 단, 이 경우에도 기존 사업자들의 선발자 우위는 지속 

□ 당사의 기회 활용 방안
   ○ 앱 이용자 시장의 니치(nitch)를 공략
      - ex. 청소년 시장 : 교통카드 및 문화상품권 수납 기능에 포커싱
                                    PC방 등 특정 업종 매장과 제휴 추진


"자, 할만 하지 않아요? 꼭 해야 하는건 아니지만 하려고 하면 얼마든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음... 그럴 듯 하네. 그런데 꼭 해야되는 것도 아닌데 왜 하라는 건데?"
"하라는게 아니라 그냥 고려해 보자는 거죠. 그보다 저 이제 가야돼요. 농땡이 치면 팀장님 한테 혼나요."







1) 5 Forces Model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ttp://mbanote2.tistory.com/298

2) 양면시장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ttp://www.itpr.or.kr/include/asp/downloadPdf.asp?articleuid=%7B4F5D27D0-7ABE-487D-8C96-9145A8EB2542%7D


3) 사실 이 때 카카오가 제로페이 사업을 깨고 나갈 것이라는걸 예감했어야 했습니다. 카카오는 매장확보에 자신이 있는 상황이었고, 이대로만 가면 간편결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로페이 사업에 들어가서 수납 매장을 공유하게 되면 이미 확보한 것이나 다름 없는 절대우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되죠. 하지만 그 당시에 저는 이걸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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