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를 쓰려면 관점을 먼저 세워야지!
마침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일하는 척하고 빈둥대는데 부서 꼬마가 보고서를 쓴다고 낑낑대는 게 보였습니다.
"왜 그래요? 뭐가 잘 안돼요?"
참고로 저는 회사에서 반말을 안 씁니다.
"팀장님이 제로페이 동향을 분석하는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팀장님이 대학 때 리포트 쓰듯이 쓰면 된다고 했다더군요. 하지만 제로페이는 IT 업계에 갑툭튀 해서는 순식간에 핫해진,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입니다. 한 마디로 최신 동향이라는 거죠.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꼬마한테 업계의 최신 트렌드를 조사 분석하라는 게 그게 되는 일이겠어요?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학문의 최신 조류는 대학원 진학을 해야 다루는 것이고, 학부생은 고전 이론을 그것도 매우 힘겹게 배우는데 말이죠. 에헴~에헴~
'애한테 뭐 이런 걸 시키셨지?' 하고 생각해 보니 아뿔싸, 이거 일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옆에서 봐주라고 하신 그 건인 것 같습니다. 어쩐지 요새 뭐 하라고 시키시는 게 없더라니!
"일단 이거 나한테 메일로 보내주고 쉬고 있어요. 좀 읽어보고 얘기할 테니."
우리 꼬마가 좀 석연찮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도 자료를 바로 보내주기는 했습니다. 역시 우리 회사 사람들은 착해요. 메일에 붙어온 파일을 보니 PDF군요.1)
문서는 워드로 작성한 문서인데 장수가 열 장이 넘습니다. 그런데 군더더기가 없어요. 자료도 많이 모았고 정리도 잘했습니다. 역시 우리 팀 사람들은 일을 잘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결론을 못 내고 있더군요. 꼬마들이 쓰는 문서가 이렇게 되는 건 다 이유가 있지요.
"□□씨, 이 보고서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내용이 뭐예요? 그러니까... 음.. 이 문서는 어떤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쓰는 거죠?"
"제로페이가 뭐고, 또 어떻게 흘러가고 있고,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지랑... 그리고 다른 데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궁금할 것 같고..."
대답이 길군요. 제 경험상 말이 길어지는 것은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고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니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것이죠. 저는 이것을 '보고자의 관점이 없다'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한때 유행하던 "맥킨지는 ~~ 하다"시리즈에 나오는 '가설을 세우지 않고 문제에 접근했다' 정도가 될 것 같군요.
꼬마의 말을 이면지에 적으면서 정리를 해 봅니다.
□ Key Questions
○ 제로페이는 시장에 안착할 것인가? (이게 잘 될까?)
○ 제로페이가 당사의 사업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 당사는 제로페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야기한 내용을 이 정도로 정리하면 될까요?"
"네, 비슷한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위에 'Key Question'이라고 적어놓은 건.... 외부기관에서 나오는 보고서에서 많이 봤죠? 이렇게 먼저 답해야 할 문제를 정해놓고 시작하면, 결론은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을 쓰면 되니까 편해요."
여기서 끝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 날은 마침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일하는 척하면서 빈둥대던 날이었습니다. 기왕 도와주는 김에 끝까지 봐주자 싶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문제의 발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씨, 하는 김에.... 그러면 뒷부분의 목차는 이렇게 꾸밀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면지에 몇 글자 더 적어 봅니다.
□ Key Questions
○ 제로페이는 시장에 안착할 것인가?
○ 제로페이가 당사의 사업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 당사는 제로페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Key Findings
○ 제로페이의 개념
○ 제로페이의 동향
○ 제로페이 관련 경쟁사 동향
○ (기타 등등 조사한 내용)
□ 결론
○ 제로페이는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전망
(또는, 제로페이의 시장 안착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
○ 제로페이 성공 시 당사의 사업에는 긍정적(부정적) 영향 예상
○ 당사는 제로페이에 대해 ◇◇◇으로 대응해야 함
"자, 이거 참고해서 한번 마무리 지어 봐요. 보고서 보니까 정리 잘했네. 금방 마무리할 수 있을 거예요."
이면지를 건네주면서 대화를 끝냅니다. 우리 꼬마의 표정이 화악 밝아지는 게 보이더군요. 여기서 끝이 나고 손을 털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2)
- 주석 -
1)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업문화는 무슨..."의 두 번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2) 이 내용은 "나, 기획한다?"의 두 번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