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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어 Oct 07. 2017

보안 같은 소리 하네!

우리는 비전도 보안을 해야 되나요?

KPI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거든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이젠 전략 수립을 할 때가 된 것이죠. 평가는 결국 평가자의 주관에 맡겨졌고요. 뭐, 일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장기전략과 연간 전략을 함께 수립하는 관계로 연중 이 기간은 끝없는 문서작업과 재작업으로 채워집니다. 당연히 기획팀은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지죠.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잡담도 같이 많아지고요.


"그런데, 작년에 우리가 전략 수립한 걸 전사공유를 했던가요?"


이번 사태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부득불 우겨서 목차에 끼워 넣은 '전년도 전략에 대한 반성' 항목을 작성하다가 지나가듯 던진 질문이 나비효과를 일으킨 거죠.


"그걸 왜 공유해? 보안 몰라?"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회사에 정보보안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경영진들에게 회사의 전략이 경쟁사로 새고 있다는 의혹이 생겼거든요.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샐 만한 전략이 있기는 하냐'며 비웃었지만 회사의 정책은 점점 빡빡해졌죠. 1)


처음엔 회의 자료를 배포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회의를 하는데 어젠다를 모르고 들어가는 상황이 왔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실적정보 등에 대한 공유도 점점 지양되었습니다. 이건 어차피 잘 안되던 거였지만요. 나중엔 기획 관련 부서에서 나오는 문서는 모조리 대내 공유 금지가 되었습니다. 2) 


그러니까 작년에 전사 전략을 전파하지 않은 것은 회사 정책에 따른 거였다 이겁니다. 문서로도 공유를 안 했고, 연초에 경영전략 내지는 전략방향에 대한 선포도 없었던 거죠. 그러고 보니 연중에 했던 기업문화 점검에서 '비전에 대한 공유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 전년도 전략에 대한 반성
  ○ 사업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부실
     - △△ 사업의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방안 부재
  ○ 경영전략에 대한 전사적 컨센서스 부족
     - 회사 비전에 대한 구성원의 이해도 저조
     - 부서 이기주의로 현업 부서 간 협업 부재(사일로 효과 발생)


"그러니까 올해는 회사의 전략을 아무도 모르고 사업을 했다는 거죠?"
"무슨 소리야? 임원 보고를 했는데." 


그게 아래로 전파가 되지를 않지 않느냐는 말이 목구멍에 걸리긴 하는데 아무래도 여기서 더 얘기를 하면 반동분자가 될 것 같은 분위깁니다. 그렇지 않아도 야근 중에 일도 많이 남았는데 자꾸 이상한 얘기를 해서 시간을 잡아먹느냐는 무언의 눈초리가 팀장님 자리에서 쏟아지는 것 같기도 했고요.


"이번에 전략수립 하면서 현업부서 참여 안 시켰잖아요?"3)


이런! 그 새를 못 참고 기어코 한 마디를 더 얹어 놓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항상 입이 방정입니다. 예전에 이러다가 반동분자로 찍혀서 모종의 계기로 부서가 물갈이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었죠.

 

"자기네들이 안 보냈잖아? 어쩌라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팀장님 목소립니다. 약간 짜증도 섞인 것 같습니다. '혓바닥이 잘못했네!' 앞니, 어금니로 혀를 꼭꼭 깨물어 줍니다. 벌을 받는 건 혓바닥인데 내가 아픈 건 왜일까요?


"그게, 우리가 전략 방향을 안 정한 상태에서 달라고 한 거라 저쪽에서도 특별히 내놓을 게 없었을 거예요."4)


오해 마세요. 제가 한 말은 아니에요. 전 혀를 깨물고 있었거든요. 앞의 잡담에 끼지 않고 있던 누가 친한 현업 부서장을 변명해주듯 한 말이에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닥치고 있었어요.


"그래? 그래도 어쩌겠어, 자기네들이 안 하는걸. 전략 방향이 나왔어도 함부로 공유할 수도 없고.."


어? 팀장님, 그런 데서 이상한 방식으로 납득하고 그러시면... 저희가 편하죠. 감사합니다. 저흰 그냥 일이나 할게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좀 침묵해 주시죠?


그런데 이번 전략 방향이 문제입니다. 작년에는 "하던 사업 열심히 하겠습니다."였다면 올해는 "전향적인 방향으로 추진해 보겠습니다."거든요. 


□ 당해연도 경영전략 기조
 ○ 핵심사업에 대한 '시장의 판을 바꾸는' 전향적인 방안 추진
    - 당초 예상대비 가속화된 산업 구조조정을 성장의 계기로 활용(위기가 곧 기회)
    - 업의 본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시장과 산업의 변화를 선도
 ○ 추진 중인 신사업에 대한 포트폴리오 조정 실시
    - 선택과 집중을 통해 '되는 사업'만 집중적으로 육성


이 기조를 관철시키느라 임원실이며 모회사며 불려 다니면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것도 대하소설 한 편일 겁니다, 잘은 몰라도요. 왜 모르냐고요? 그 고생을 팀장님이 하셨거든요. 5)


그간의 노고가 보상을 받으려면 전략이 잘 실행돼야 하는데, 이거 공유 안 할 거잖아요? 수립 과정에 현업부서 참여도 안 시켰잖아요? 이거 잘 될까요?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의구심이 두둥실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으악!


"팀장니임! 상세 실행방안을 만들려면 현업과 컨센서스가 먼저 있어야 하겠는데요? 맘대로 써 놓으면 감당 못할 것 같은데요?"


차라리 비명이었다고 해 주세요. 전 정말 다급했어요. 그런데 다들 뜨악한 표정입니다. 뭐야, 이거 아무도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건가요?


"일단 대강이라도 만들어 놓고, 나중에... 음..."


팀장님 말씀이 갑자기 끊깁니다. 가만 보니 "너 빠져!"가 입에서 나올락 말락 해 보이는 입을 하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쟤가 던져 놓은 "전향적 전략" 때문에 파란을 겪었는데, 실행방안까지 맡겼다간 아주 회사를 들어 엎겠다 싶은 거죠. 


"너 빠져!"가 나오면 곤란합니다. 이번에 전략 기조 만드는 역할을 잡으려고 얼마나 사내정치를 했는데요. 거의 반정을 일으키다시피 했단 말이죠. 사약받을 일 있습니까?


"음.. 그냥 비워놨다가 현업부서 들 거 취합받자"


다행입니다. 아직은 일이 제 손에 있군요.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팀장님, 나이스 샷!"이라고 하고 싶지만 잠깐만요! 뭔가 문제가 있는데요? 그런데 이걸 입 밖에 꺼내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어쩌죠?


"근데, 전략 기조 공유를 못 하는데 취합을 받은들..."


저 아닙니다. 저는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회사의 보안정책에 도전할 만큼 용감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상이 불순하지 않습니다. 저는 회사에 충성합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일합니다.


"그러네. 그건 그렇고 □□(제 이름입니다), 큰 방향까지는 다 만들었어?"
"네. 방금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오늘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보자."


응? 생각보다 온건한 반응인데요? 그리고 아싸, 퇴근입니다! 무심결에 내 지른 다급한 비명이 우리의 야근에 브레이크를 걸었어요! 모두들 흥겹게 퇴근을 준비합니다. 야근 뒤풀이 회식요? 우린 그런 거 안 해요, 팀장님이 싫어하셔서. 조직 문화는 역시 리더가 만드는 건가 봐요.


들뜬 기분은 사무실 나올 때까지만 지속되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는 고민이 깊어집니다. 모든 구성원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그놈의 보안 때문에 전략 기조나 비전을 전사공유할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뭐가 문제인 걸까요? 우린 비전도 보안을 해야 하나요?



 - 주석-


1) 사실 이 회사에도 전략이라는 것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걸 모회사에도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어떤 내용이건 없지는 않았던 겁니다. 문제는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거겠죠.

2) "대외 공유 금지"가 아니라 "대내 공유 금지"입니다. 내부에서도 돌려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정보를 빡빡하게 통제가 되면 조직은 그 행동 하나하나를 임원의 지시에 심하게 의존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임원은 모든 내용을 '보고'받으니까요.

3) 사내에서 만드는 전략 보고서가 선언적인 내용으로 채워지는 주된 이유입니다. 재무, 인사, 조직에 이르는 영역을 모두 아우르려면 담당 부서가 어떠한 형태로든 참여를 해야 합니다. 영역에 대한 지식(Domain knwoledge)을 기획부서가 모두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4) 전략에 대한 컨센서스가 없으면 기획부서는 문서를 만드는 부서로 전락하고 맙니다. 전략이 전파되지 않으면 현업부서는 그냥 하던 거 열심히 하는 곳이 되어버리고요. 

5) 지배구조(Corporate govenance)와도 관련되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회사의 경영진이 충분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지 못하면 회사의 전략도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도전적인 전략은 투자를 수반하는데, 지배구조상 또는 경영진의 권한상 대규모 투자가 불가능하거나 어렵다면 결국 "하던 거 열심히 하겠습니다." 외에는 답이 없어지죠. 아마도 지배구조 쪽에 이런 내용의 문헌이 있을 것 같군요.(한번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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