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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토포스 Sep 15. 2016

실존의 본질에 대해

박민규 작, 아침의 문을 읽고

46,558 19,481 26,897.


위의 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할까. 잘 모르겠다면 중간에 몇 가지 기호를 넣어보자. 46,558 - 19,481 = 26,897. 첫 번째 숫자는 새벽 2시를 기준으로 오늘 태어난 사람의 수이다. 두 번째 숫자는 오늘 죽은 사람의 수, 그리고 마지막은 “순 인구 증가율” - 참 역겨울 정도로 재미있는 말이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다. 그런데 위의 식을 계산 해보면 결과가 맞지 않는다. 타자를 치는 찰나와 같은 순간에도 숫자가 끊임없이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 죽고 태어난 사람의 숫자만 수만 여 명에 이른다. 그뿐이다, 다른 특별할 것은 없다.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고 별다른 의미도 없다. 인간들은 존재하면서 무언가에 의미라는 것을 부여하려고 한다. 특별하게 만들려고 한다. 누군가의 탄생은 행복하고 축복받을 만한 것,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것. 남과는 달리 소중한 내 아내, 우리 가족, 내 아들, 친구 등등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자연으로부터 존재를 강요당한 인간은 그 형벌이 끝나고 해방이 되는 순간까지 시간이라는 놈이 가하는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 자꾸만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축복이라 명한 삶을 이어나갈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그에 대한 즉 삶에 대한 완전한 이유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실제로는 그냥, 무의미 상태로 그렇게 있는 것들에 자신들이 이유를 부여하였으면서도 -만들었으면서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 ‘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이 존재해야 하는 어떠한 이유도 실제로 있지 –존재하지- 않다. 인간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진 것처럼, 이유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끄집어 내보았다. ‘무의미’ ‘허무’ ‘알 수 없음’


남자에게 세구의 시신은 그냥 고깃덩어리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모택동이 고작 청바지 회사의 사장일 것이라고 말한다. 모택동이 존재했던 이유가 이 남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또 남자는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는 아름다운 모델의 사진이 아니라 고작 천장을 바라보며 자위를 한다. 모델이 자신의 삶의 이유라 여길지 모르는 아름다움 역시 이 남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고 투명한 허연 액체로 모델의 얼굴과 몸뚱이를 덮어버린다. 아무런 의미도 존재의 이유도 없다. 여자에게 인간은 괴물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은 타인만이 아니라 여자 자신에게도 해당이 된다.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그렇잖아?’ 뿐만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미시적 자신의 삶과 거시적 세상이라는 놈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 허무와 무의미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뿐이다. ‘존나’ ‘씨팔’ 그럴 뿐이다.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이 끝이 없는 허무와 지독한 무의미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자살을 할 수 없다. 허무와 무의미함을 인정하는 인간만이 강요받은 자신의 존재함을 스스로 끊어낼 수 있다. 그것이 곧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이기에. 자신의 존재가 선험적으로 어떤 필연적인 이유나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 허무와 무의미함을 끌어안고 자살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하나의 문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문을 연 순간부터 스스로 혹은 타의로 그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허무와 무의미의 세상에 맞닥뜨린 한 짐승에게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삶이 펼쳐진다. 어떤 ‘의미’라는 놈들로 다양하게 보이는 그런 삶들이 말이다. 정말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많은 것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같은 하나의 문 – 결코 우아하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별 의미가 없고 알 수도 없는 그런 하나의 문 –을 통해서 나간다. 이것이 유일한 본질이다. 실존의 본질.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유일한 실재적 문제에 한해서는 실존과 본질이 동행할지도 모른다. 무의미와 허무는 실존하며 온갖 그것들에 덧칠된 의미라는 놈의 본질이다.


이 소설에는 그런 실존적 상황 속의 본질인 ‘무의미’와 ‘허무’라는 놈에 당면한 인간들, 그냥 살아가고 존재하는 인간들에 대한 모습이 담겨있다. 여자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인간이라는 단어를 한 꺼풀 벗겨내면 그저 짐승, 괴물일 뿐임을 안다. 남자는 인생이 ‘허무’와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알지는 못한다. ‘모른다.’ 진정으로 알았다면 남자든 여자든 자살을 했을 것이기에.

 

결국 인생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온갖 무의미와 허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대롱대롱 매달려 이를 악무는 것, 힘을 주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욕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만든 의미를 부여잡고 허무와 무의미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그냥 존재할 뿐인, 그저 살아갈 뿐인 사람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불행히도 나는 아직 완전히 그 무의미함과 허무를 힘껏 껴안을 자신이 없다. 머리로는 할 수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지만 아직 너무 많은 미련에 온 몸이 꽁꽁 묶여있다. 그래서 내가 만든 삶의 의미,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그것에 묶여있다. 강요받은 내 존재에 덧칠된 의미를 부여잡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 자살과 살자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리고 당신은? 씨팔, 뭐 내 알 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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