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서평
수많은 뽐뿌 중 가장 참기 어려운 게 여행 뽐뿌다. 연휴만 있다 하면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올해는 이직을 하면서 여행 가기가 어려워졌다. 새 직장에 집중도 해야 하고 연차도 작년보다 훨씬 줄었다. 1월 입사다 보니 월차로 계산해 고작 11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직장인들은 알겠지만 연차 11일쯤은 이런저런 일로 쓰다 보면 훅 사라진다. 그래도 스스로를 위해 1년에 1번은 해외로 떠나야 하지 않냐는 생각에 방콕행 항공권을 충동적으로 끊어버렸다. 대신 앞으로 연차 사용에 스크루지 영감처럼 인색해지기로 했다. 술도 줄이기 시작했다. 왜 술이냐고? 전날 과음은 내 연차를 조기 소진시키는 제1원인이다. 여행에 대한 욕구는 여러모로 바람직한 셈이다. 마음도, 간도 프레쉬해지니까.
올해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딱 30년 된 해다. 아직 20대인 난, 여행을 가려면 정부의 허락을 맡아야 했던 과거의 시절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지난해 해외 출국자 수는 2,800만 명, 하루에 약 7만 명의 국민들이 해외로 떠난다. 여행은 이제 소수의 특권층만 향유하는 호사가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여가 활동이 되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 여행을 기다리며 하루를 버틴다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많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인류의 여행은 이제 국경을 넘어 우주로 향한다.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등 기업가들은 우주여행 시대를 열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먼 훗날 역사는 21세기를 '호모 비아토르'의 시대로 정의하지 않을까.
김영하는 이런 '호모 비아토르'의 향기를 강하게 풍기는 작가다. tvn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통영 편에서 그는 한식 대신 피자를 먹으며 남다른 식도락을 보여주었고, 피렌체 편에선 이태리어로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하기도 했다. 김영하는 외모도 괜찮은데 말도 잘하는, 흔히 말하는 '사기캐'인 작가지만 작가지만 <알쓸신잡>에서 유달리 더 돋보였던 건 오랜 여행을 통해 쌓인 그만의 여행 철학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여행 에세이를 출간하리란 건 삼척동자도 알만큼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던 나는 메인 배너에 걸린 그의 책 <여행의 이유>를 보자마자 저항할새 없이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여행의 이유>를 펼치며 나는 그가 <알쓸신잡>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멋지고 유려한 여행기를 기대했건만, 그런 건 일절 없었다. 예상과 다르게 책은 그가 집필을 위해 상해로 떠났다가, 상해 푸동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강제 추방을 당하는 일화('추방과 멀미')로 시작한다. 어이없게도 중국에 가려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여행 에세이를 썼는지... 쿨럭) 그렇게 강제 출국을 당한 김영하는 중국이 '중공'으로 불리던 시절, 대학생 신분으로 떠났던 그의 첫 해외여행을 떠올린다.
운동권 대학생이었던 김영하에게 중국은 사회주의의 혁명을 이룩한, '배우러 가야 하는' 국가였다. 그와 그의 친구가 사회주의의 미래를 책임질 베이징대 학생을 만나 그의 기숙사까지 방문하게 된 건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찾으러 가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인 수순. 그러나 정작 그들이 기숙사에서 마주한 건 벽에 걸린 거대한 미국 지도와 그곳으로의 유학을 꿈꾸는 중국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여행은 그들이 떠나기 전 품었던 기대와는 다르게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점철되고 만다.
여행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작년에 난 프랑스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던 지하철에서였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지갑에 현금은 없었지만 카드가 있었다. 소매치기를 인지하고 카드사에 신고하기까지 30분 남짓 동안 소매치기범은 내 카드로 화장품 3백만 원어치를 구매했다. 난 그가 안티 에이징 화장품도 골랐길 바랬는데, 주름진 그의 삶이 조금이라도 펴졌다면, 하는 자선가의 심정으로 애써 괜찮은 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오래 가진 않았다. 앞으로 당분간은 여행을 가지 말아야겠다고 맘먹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야."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다. 여행이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가장 완벽한 여행은 무여행, 즉 여행을 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때 내가 프랑스에 가지 않았다면 300만 원짜리 청구서를 받아볼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때 김영하가 중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젊음을 쏟았던 믿음이 무너지고, 강제 추방이라는 수모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여행에 대해 품는 설렘, 흥분, 기대와 다르게 대부분의 실제 여행은 실망, 좌절, 고됨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난 여행을 끊지 못하는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꿈꾸는 걸까. 중국 여행 이후 김영하는 대학원에 진학하고, 그의 친구는 대기업에 취직한다. 대학원에서 김영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중국에 가지 않았다면, 그가 베이징대 학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소설을 영영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명확한, 외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지만 '내면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라고. 중국으로 떠나기 전 천안문 사태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보았던 그의 내면에서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처럼 '여행의 이유'는 여행을 떠나는 당시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지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야 만 어렴풋이 짐작이 갈 뿐이다.
얼마 전 친한 선배가 2년 간의 세계 여행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배에게 물었다. 좋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세계 여행을 왜 지금 가는 거냐고. 선배를 대신해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여행을 떠나는 데 이유는 꼭 필요 없어요. 어차피 지금은 알 수도 없는 거니까요."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