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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현 May 19. 2019

슬픔이 지겨워지신다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서평 

 사랑의 가장 큰 적이 권태이듯이 세상의 많은 것들도 지겨움을 비껴가긴 어렵다. 슬픔도 때로는 지겹다. 이 문장을 쓰면서 스스로를 잠깐 혐오했다. 하지만 진실은 대개 아름답기보다 추한 법이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기보단 육개장 한 그릇 먹고 나면 언제 일어날까 눈치를 보는 조문객에 가깝다. 내겐 일상이 우선이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주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비극들이 있었다. 그 비극들 앞에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슬퍼했다. 내가 가진 최소한의 윤리였고, 일종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슬픔이 정말로 충분했던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벚꽃이 만개했던 얼마 전이 세월호 5주기였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인간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를 짚으며 출발한다. 인간의 심장은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타인의 몸 속에선 뛸 수 없다’ 는 것. 사람들은 타인의 슬픔을 지겨워하는 이들을 비난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계몽의 역사처럼 본성을 이겨내려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공부다. 슬퍼하지 않는 심장을 가진 나는 머리로라도 슬픔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신형철은 내게 슬픔을 가르쳐 준 첫 번째 스승이다. 그에게 배운 슬픔을 몇 가지 적어본다. 


출처 : pixabay

고통에 꿰뚫린 인간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브레이킹 배드> 시즌 2에는 불의의 사고로 딸을 잃은 항공 관제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으로 돌아가는 에피소드가 있다. 장례식에서 딸에게 입힐 마지막 옷을 태연히 고르는 그는 딸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탕비실에서 마주친 직장동료가 괜찮은질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작정 쉬는건 도움이 안 되더라고, 차라리 여기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는 관제실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잘못된 관제로 두 비행기가 상공에서 충돌한다.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고통은 괴롭다. 고통을 겪는 이도,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도 모두가 힘들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권하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한다. 고통을 극복해내야 한다고 되뇌이는 건 고통을 겪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관제사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딸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아니 이겨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인간에게 그 이전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처는 단지 아물 뿐, 지워지진 않는다. 그마저도 보살피지 않으면 상처는 곪아터지고야 만다. 관제사의 이야기는 극적인 요소가 있지만 고통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고통을 겪은 본인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진정성은 시간에서 나온다


 인간관계는 늘 복잡하고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함께한 시간만큼 관계도 깊어진다는 것. 문제는 우리가 종종 바쁜 일상을 핑계로 ‘충분한 시간을 지불하지 않고’도 타인의 마음을 얻으려는 꼼수를 부린다는 점이다. 그런 시도가 몇 번은 성공한다. 그러나 꼼수는 언젠가 들통나게 되어 있다.


 슬픔을 겪는 타인 앞에서 이런 꼼수를 쓸 여지는 더욱 없다. 슬픔에 잠겨 있는 그들에게 우리는 종종 위로의 말과 제스처를 건내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위로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우리는 인식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옆에 있어주는 것 뿐이다. 지인의 장례식장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꼭 들르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어쩌면 시간은 인간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진실된 것 중 하나다.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안 준 것’이라는 신형철의 지적처럼, 때로 진정성은 시간에서 나온다.   

 <듣기의 철학>에 따르면 ‘터미널 케어’(말기 간호)의 본질은 환자가 ‘어떤 병원에서 어떤 의료 행위를 받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있다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케어이므로, 케어란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끝까지 듣고 나중에 판단한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는 요즘은 신속한 정보 습득과 빠른 판단이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이나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 섣부른 결론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최근 들어 가짜 뉴스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는 건 가짜 뉴스의 생산 자체 때문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를 쉽게 진실로 믿어 버리는 대중들의 조급함, 다른 진실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불성실함에 있다. 우리가 아는 건 대부분 ‘진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물며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는 더욱 정확히 알기 어렵다. 상처나 고통은 대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할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슬픔에 대해 모른다면 그저 침묵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성마른 이해와 이에 기반한 잘못된 말들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우리는 타인이 뱉은 말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벨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까먹곤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는 것이다. 끈기와 신중함은 슬픔을 공부하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지금껏 살면서 운좋게도 큰 슬픔을 겪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까운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겪은 적은 종종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고나면 그들은 이내 멀어졌다. 내가 멀리한 건지, 그들이 떠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기억들이 종종 괴롭다. 그래서 오늘도 읽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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