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 책 리뷰
한참 전화 영어를 배우던 3년 전쯤, 날 가르치던 필리핀 선생님과 친해져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정치학 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이었는데, 생계유지를 위해 전화 영어뿐 아니라 어느 아마존 셀러의 고객 응대 업무를 수행하는 투잡을 뛰고 있었다. 셀러가 판매하는 상품 페이지에 달린 고객 문의 댓글이나 이메일에 답장하는 게 주업이었는데, 그는 그 일이 큰돈은 안 되지만 자투리 시간에 어디서든 노트북으로 처리할 수 있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셀러는 영국의 40대 워킹맘이었는데, 육아 때문에 잡무를 그에게 맡긴다고 했다. 종종 그가 처리할 수 없는 업무가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곤 그가 그녀와 연락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긱 경제'는 대개 특정한 프로젝트나 단기 업무를 위해 임시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과 일거리가 필요한 사람을 서로 연결해주는 서비스 또는 이러한 노동 환경을 의미한다. 긱 경제는 언뜻 새로워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유연한 노동에 대한 오랜 니즈와 맞닿아 있다. 기업들은 고용의 부담이 없는 노동력을 언제나 원해왔고, 노동자들 또한 육아나 학업 등 다양한 이유로 단기 일자리를 원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기업과 노동자 양측이 서로 적합한 상대를 찾기 위해 써야 했던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고, 기업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버의 기사부터 부릉의 배달부, 위시켓의 프로그래머까지 이젠 긱 경제가 뻗치지 않은 노동의 영역을 찾아보기 어렵다.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는 미국의 긱 경제를 기업과 노동자 측면 모두에서 심층 취재한 책이다. 많은 긱 경제의 창업자들은 긱 경제가 기존 노동 시장의 문제를 해결해 기업과 노동자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내 필리핀 선생님의 경우를 보면 어느 정도 맞는 것도 같다. 영국의 워킹맘 기업가는 기업 운영의 일부를 맡기는 대신 육아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 필리핀 선생님은 덕분에 학업과 생계를 병행할 수 있었다. 특히 노동자의 관점에서 언제든지 원할 때 일할 수 있고, 정규직 대비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은 긱 경제가 갖는 큰 장점이다. 직장에서 실직 후 우버 기사 생활을 했었던 한 기자는 이렇게 썼을 정도다. "나는 우버가 대공황기에 있었던 공공근로 진흥청의 현대판이라고 생각한다. 우버 덕분에 나는 가난하지 않다."
모든 일자리 문제가 그렇듯, 문제는 일거리가 없는 불황기다. 에어컨 회사의 원격 콜센터 일을 하던 게리는 문의 전화가 몰리던 여름 시즌에는 꽤 짭짤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여름이 끝나자 일감이 현격히 줄었고, 이젠 그가 일하고 싶어도 주 20시간을 일하기도 어려워졌다. 긱 경제엔 고용도, 해고도 없다. 고용한 적 없으니 퇴직금이 없고, 해고한 적 없으니 실업 급여도 없다. 노동 수요가 줄어들 때 긱 경제의 노동자들은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의 보호 없이 충격에 즉각적으로 노출된다. 그래서 많은 긱 경제의 노동자들이 투잡, 쓰리잡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집에 10년째 정수기 필터를 갈아주시러 오던 아저씨는 최근 정수기 수요가 줄자 자동차 딜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여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직업이 자주 바뀌는 환경 속에서 노동자는 전문성을 키우지 못하며 쉽게 접근 가능한 저 숙련 노동만을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미국은 긱 경제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기 위한 제도적 논의를 시작했다.
책을 찾아보면서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는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는 리뷰들을 보았다. 속해 있는 직장을 박차고 나와 멋지게 살아가는 프리랜서나 디지털 노매드의 모습을 기대한 독자들인 것 같다. 그런 기대를 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가 심층 취재한 긱 경제의 노동자들, 청소 노동자와 콜센터 상담사, 우버 기사들의 현장은 우리가 다니는 일반적인 직장과는 조금 멀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긱 경제가 우리와 관계 없는 미래라고 섣불리 치부해선 안 된다. 한 때 허황된 상상으로만 느껴졌던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자리 상당수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긱 경제는 기업들에게 고용 없이도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책 부제의 한 구절처럼("The end of the job, The future of work") 긱 경제가 적어도 우리의 일거리(work)를 없애진 않겠지만, 우리가 다니던 직장(job)은 차츰 없애갈 것이다. 이직이나 퇴사를 넘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더욱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그때가 오면 박차고 나갈 직장도, 옮겨갈 직장도 없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