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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현 Feb 09. 2020

밀레니얼들의 노력은 왜 보상받지 못하는가

책 <밀레니얼 선언>과 영화 <위플래쉬>

  근래 들어 밀레니얼들을 이해해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해 문 대통령이 추천하며 서점가를 휩쓸었던 <90년대 생이 온다>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 때 청년들의 도전 정신과 노력이 부족하다며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밀레니얼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들과의 공존은 기성세대에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90년대 생과 일하는 법> 등 밀레니얼을 다룬 콘텐츠나 기사를 보면 다수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2010년대 대한민국은 유난히 세대 간 대립이 심했다. 꼰대, 틀딱, 급식 등 특정 세대에 대한 혐오 표현만 수 가지다. 사회를 이끄는 기성세대가 어떻게든 청년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신호다.  


 이런 밀레니얼 담론에서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눈에 잘 보이는 밀레니얼의 표면적인 특징들만 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욜로, 소확행, 플렉스 등 소비 트렌드에나 붙일 키워드들이 밀레니얼을 이해하기 위한 잣대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접근도 틀린 건 아니지만, 밀레니얼이란 세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과 탐구는 분명 부족하다. 맬컴 해리스의 <밀레니얼 선언>는 밀레니얼의 성장 환경을 심층적으로 파헤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무대는 미국이지만 한국의 청년들이 동시에 보인다. 어느 세대보다 많은 교육을 받고도 극심한 일자리 경쟁에 내몰리는 청년들의 모습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  


 책을 보며 대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가 떠올랐다. 흔히 <위플래쉬>를 음악적 성취와 이를 이루기 위한 피 나는 노력 사이의 모순적이고 불가분 한 관계를 다룬 예술 영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선 <위플래쉬>가 밀레니얼에 관한 일종의 우화로도 보였다. 영화 속 주인공 앤드류는 음악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드러머였지만 우연한 계기로 플레처 교수를 만나 그의 밴드에 발탁된다. 연주가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의자를 던지고 쌍욕을 박는 플레처의 지도법은 극악무도, 그 자체다. 하지만 앤드류를 더 극한으로 몰아넣는 보이지 않는 요소는 언제든 자신ㅇ이 다른 드러머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있다. 그는 경연에 악보를 챙겨 오지 않은 메인 드러머의 실수를 기회로 삼아 보조 드러머를 벗어난다. 맬컴 해리스가 지적했듯, "유년기는 더 이상 실수를 저질러도 좋은 시절이 아닌" 셈이다. 그렇게 꿰찬 메인 드러머 자리는 더 위태롭다. 플레처는 경연이 끝나자마자 다른 드러머를 밴드에 데려와 앤드류와 경쟁시킨다. <위플래쉬>는 유명한 재즈 곡의 제목인 동시에 '채찍질'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대미언 셔젤, <위플래쉬>(2014)


 앤드류가 겪는 극단적인 경쟁과 이를 교육적 이념으로 위장하는 플레처의 모습은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가 경험하는 일반적인 교육 환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앤드류가 손에 피범벅이 될 정도로 가혹적인 연습에 몰두했듯,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무수히 많은 밀레니얼들이 어린 시절 그 자체를 학업에 온전히 바친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마치고 대학에 가면 더 힘든 던전이 밀레니얼을 기다린다. 취업 시장은 말 그대로 바늘구멍이고 대다수는 변변찮은 직장조차 구하기 힘들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개선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화된다는 점이다. 어린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학습량은 끝을 모르고 늘어만 간다. 요즘 대치동 영어 학원들은 초등학생에게 수능 영단어를 암기시킨다고 한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건 다름 아닌 기업이라고 맬컴 해리스는 지적한다. 과거 기업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막대한 훈련 비용을 투자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 훈련의 몫은 국가와 개인의 것이 되고 있다. 최근 코딩과 AI가 유년기 학습의 트렌드가 되고 있는 건 시대가 변하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산업계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기도 하다. 이렇게 유년 시절부터 생산성 높은 인적 자본으로 길러진 밀레니얼들이 노동 시장에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금의 취업 시장은 취준생에겐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절이지만, 고용자에겐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절이다. 


 다시 <위플래쉬>로 돌아가 대단한 음악적 쾌감을 선사하는 앤드류의 마지막 연주 장면이 긍정적으로만 읽히지 않는 것도 결국 앤드류가 처한 냉혹한 현실 때문이다. 앤드류와 플레처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고 모두 상처를 입지만 회복하기 힘든 나락으로 떨어진 건 단연 앤드류다. 플레처는 학교를 나와서도 여전히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는 밴드의 수장이고, 앤드류는 음악 학교를 중퇴한 드러머에 불과하다. 우연히 만난 앤드류에게 플레처는 이번 공연에 드럼을 쳐 줄 수 없겠냐고 제안한다. 앤드류는 이를 수락하고 무대에 오르지만,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알려주지 않는 곡을 선곡하여 그에게 복수한다. 


 앤드류는 왜 그 제안을 수락했을까. 플레처에게 겪은 수모와 폭력을 그는 잊은걸까. 난 그가 플레처의 연주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앤드류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건, 드러머로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플레처는 그마저 잔인하게 짓밟는다. 저자는 밀레니얼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 따윈 없다고 단언한다. 나 또한 그렇게 믿는다. 곧 있으면 총선이다. 적어도 이번엔 우리 정치가 청년들에게 값싼 희망을 심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맬컴 해리스, <밀레니얼 선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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