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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May 25. 2017

간디, 모든 이상주의자들에게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가 되자.” 

  도덕책이 무의미한 세상 같다. 옳다고 믿었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들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순간들 때문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 애쓰지 않으면 내 것까지 잃고 마는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세상은 원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회의가 들 때가 많다.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은 수없이 좌절하고 불행해진다. 그래서 간디가 궁금했다. 영국이 쳐들어와서 다 부수고 뺏어가고 괴롭혀도 맞서 싸우기보다 물레를 돌리자고 한 사람. 그의 사상과 이상보다 궁금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였다. 비쩍 마른 몸에 물레를 돌리는 모습, 그 약하고 가여워 보이는 모습으로 인류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된 간디.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시전 한 사람이 아닐까.

  먼저 간디기념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엔 여행자들보다는 현지인의 방문이 많다고 한다. 간디에 대한 인도 사람들의 존경심은 엄청나다. 인도인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 라스트 피테, 마지막 아버지라는 뜻이다. 마하트마 전시장에는 간디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 시 까지의 사진, 언론 기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간디의 명성에 비하면 전시내용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제국의 위엄 있는 왕궁과 성전보다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작고 비루한 이 박물관이 나에게 더 큰 마음의 여운을 주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 번쯤 거대한 폭력과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저항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폭력은 자멸이다" 와닿았던 말

  박물관을 나서서 걸어서 3분 정도 되는 거리에 간디를 화장한 추모공원인 라즈가트가 있다. 연 천만명이 넘는 참배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간디에 대한 인도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다. 대리석 재단뿐 아니라 주변 공원 역시 성의 있게 조경을 조성해 놓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딜 가도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운 인도지만 이곳만큼은 숭고한 정신과 평온함이 흐르고 있었다. 대리석 재단에는 짤막한 힌디가 쓰여있었다. 가이드북을 참고하니 간디가 남긴 마지막 말, 헤이람 Hai Ram이라고 한다. 라마신이여...라는 뜻이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남긴 말은 자신의 철학이나 생애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신을 찾으며 떠난 그에게서 그가 신 앞에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간디의 마지막 말이 담긴 대리석 재단 

  간디 박물관과 추모공원을 둘러보면서도 엄숙한 아우라 속에 그가 분명히 인도인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는 존재라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답을 찾지 못했다. 간디의 승리 비결을 알게 된 것은 델리의 여러 유적지에서가 아니라 생뚱맞게도 바라나시에서였다. 게스트하우스 1층 책장에 누가 놓고 갔는지 <간디 자서전>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수많은 가이드 북 사이에 놓인 그 책을 발견하고 며칠 동안 바라나시의 강이 보이는 옥상 위에 올라가 틈나는 대로 읽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임에도 이곳 인도까지 그 책을 들고 와 이곳에 기증한 한 여행자는 누구일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간디가 직접 회고한 유년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변호사로 지냈던 20여 년의 시간, 고국으로 돌아와 독립투쟁을 하던 시기에 대한 기록이다. 칭송받는 인물의 책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던 과거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자신의 생각이 변하게 되는 과정이 겸손하게 담겨있다. 간디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카스트루바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당시 그는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일탈을 저지르기도 하고 성적 호기심도 넘쳤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영국에서 유학하고 변호사가 된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업차 건너가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가 처음 남아공에 가게 된 것도 변호사로서의 재능도 특출 나지 않고 본국에서도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첫 공판에서 심장이 떨려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해 무시당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떠난 남아공에서 그는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남아공에서 그는 인도인들이 해방된 아프리카 노예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을 본다. 한 번은 1등석 표가 있었음에도 인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짐짝과 함께 기차 밖으로 내던져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남아공 현지에서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가로 활동하게 된다. 변호사로서의 재능은 없었지만 자신이 진정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았고 남아공에서 그는 많은 이들의 감사와 존경을 받으며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1915년 20년 만에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극민회의 정치가로 활동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인도의 독립을 위해 힘쓰며 생을 마감한다. 

  인도에 돌아와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간디는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도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와 자치권 확대 정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독립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민중의 삶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런 현실에 간디는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가장 낮은 곳에서 혁명을 시작했다. 그는 민중의 입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농민의 소작료를 올리고, 소금세를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민중을 향한 진심이 그가 인도인들의 진정한 아버지로 기억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아주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행진하기, 하던 일 멈추기와 같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금을 독점 생산하려던 영국인들에게 대항해 바닷물을 손에서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수많은 인도인들의 동참을 가능하게 했고 곳곳의 바다에서 손으로 소금을 만드는 인도인들을 영국 정부는 제압하려 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마는 사건도 있었다. 무력 통치와 폭력적 진압에 맞서 단식을 하거나, 물레로 옷감을 만드는 평화적인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던 간디. 무모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그 전략을 간디는 굳게 믿고, 뚝심 있게 지켜나갔기에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가는 몸으로 물레를 돌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감동을 주는 이유다. 

  위대한 성인의 남다른 점은 무엇일까 궁금했으나 막상 알게 된 진실은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민중을 생각했고,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은 대로 꾸준히 밀고 나갔던 것. 남을 헤치지 않고 평화를 외쳤던 것. 그것이 간디가 세상을 바꾼 힘이고 지금까지도 모든 이들에게 기억되는 이유였다. 그는 성인이기보다 실수와 성찰을 반복했던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한 명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아들과 의절하기도 했고, 아내가 위독한 상황에서 서양식 진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서툰 부분도 있었지만 민중을 향한 그의 진심과 고집만큼은 위대하다 할 만했다. 어쩌면 당연한 진실, 가령 비폭력이나 불의에 맞서는 등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 그토록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그가 인도인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이 숭배가 아니라 진심 어린 존경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다가도 정의에 눈뜨고,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럴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간디가 가르쳐준 것은 엄청난 희생이 아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아주 작은 원칙과 실천이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사소한 진리이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간디처럼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가 되자
-마하트마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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