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밥 그리고 밥통
"아라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머에요?"
함께 일하는 지원이 식재료를 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현미밥?"
아직까지 한국 사람에게 "밥"하면 바로 떠오르는 식재료가 "쌀"일까.
적어도 엄마와 내게는 그렇다.
그 선호에 있어서 쌀은 늘 면과 비교되는 대상인데, 끼니를 고를 때에 특히나 그렇다. 그 사이 별미 간식이었던 빵까지 식사의 반열에 올라, 끼니를 고를 때면 쌀밥으로 할지 국수로 할지 혹은 빵으로 할지를 밥시간의 동무들과 정하곤 한다. 지금은 쌀과 국수에 있어서는 항상 쌀에 손을 들지만, 신식? 현대 요리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첫 주자는 늘 면, 파스타일 것이다. 퓨전 양식을 파는 작은 식당의 요리사로 일할 때부터 본격적으로 습득한 이태리 면요리, 파스타는 친구들이 나를 기억하는 한 가지의 요리가 되었지만, 파스타는 되려 내게 쌀에 대한 애착을 이끌어 준 요리이다. 손님에게 내는 음식이 파스타라면 직원 식사는 적어도 리조또여야 했다. 이 양식 요릿집에서 요리를 시작하기 전의 나는 쌀 없이 빵과 채소, 계란, 가공 육류 정도로 잘 먹고살 수 있었고, 어머니는 김치와 쌀밥을 먹지 않는 끼니는 나를 병들게 할 것이라며 늘 걱정했다. 자취를 시작할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가 반드시 챙겨주었던 주방 도구도 "공기"라 불리는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전기밥통이었다. 해외에 유학을 가는 친구들이 이고 지고 갔던 품목도 압력밥솥 혹은 전기밥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겁고 귀찮아 두고 나갔다가 결국엔 현지에서 비싸게 사거나, 친구나 부모님 편으로 어렵게 받은 것이 밥솥이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갓 지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흰쌀밥에 참기름을 떨친 명란젓이나 곰삭은 파김치를 얹어 호호 불어 먹는 상상을 하면 저절로 침이 나온다. 흰쌀밥에 관련한 기억은 그 온도와 자연스레 연결되고, 어쩌면 이 쌀밥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돌솥 안에서 절절 끓는 국물 역시 잘 들이켜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흰쌀밥은 매우 보편적인 백반의 그 밥과 대번에 연결되는 반면, 다양한 곡물과 현미로 이뤄진 잡곡밥은 식당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어릴 적 집에서 거의 먹지 못하는 음식이었다. 현미잡곡밥은 정월대보름에나 먹을 수 있는 오곡밥과 같았다. 그 이유를 쉽게 예상할 수 있을까. 식탁 위의 독재자, 아버지의 선호가 흰쌀밥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할머니가 오셔, 나를 위해 꽁보리밥을 지어주셨는데, 반드시 밥통에 흰쌀밥이 아버지를 위해 준비돼 있어야 하기에 밥을 두 번 지으셔야 했다. 밥은 늘 압력솥에 매끼 해서 먹었고, 남아서 전기밥통으로 들어 간 밥은 쉽게 색이 노랗게 변해 나와 남동생의 도시락용 볶음밥의 재료가 되었다. 현미나 다른 곡물이 많이 든 밥은 까끌거려 견딜 수 없다는 아버지의 혀와 식도가 원망스러웠지만, 집안의 왕에 반했다가는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에 큰소리가 나 체할 수 있기에 꾹 참고 몰래 엄마와 할머니를 졸라 완두콩이 잔뜩 든 밥이나, 보리 100%의 꽁보리밥을 얻어먹었다. 다 자라서는 아버지의 유별난 식성과 잔소리를 떠올리며 비아냥댔지만, 그를 이해하고자 "아주 조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잡곡은 반드시 오래 불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허투루 했다간 그 거칠기가 어쩌면 도정 기술이 발달한 지금과는 달랐을 성도 싶다. 가난한 유년시절, 지겹게 먹던 보리 잡곡밥에 대한 트라우마로 강하게 거부하였을 성도 싶다. 이러나저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이 밥투정은 그 시절의 밥상을 경험하지 못한 자의 무지를 깔고 유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 지은 흰쌀밥에 대한 그의 열망을 향한 반기였을까, 잡곡밥에 대한 나의 애정은 더욱 커져갔다. 초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던 유정이가 싸오는 (기억으로) 11가지 잡곡으로 지은 잡곡밥을 한 숟갈 맛보고는 다양한 곡물의 맛과 질감이 느껴지는 그 밥에 반해 엄마에게 매일 간곡히 잡곡밥을 부탁했지만 묵인되었다. 유정이네는 우리 집과는 정반대의 밥을 먹었다. 흰쌀밥을 먹는 날이 드물다는 것. 유정이가 자신의 잡곡밥에 투덜대는 것을 보자마자, '옳커니!' 하며 그에게 부드러운 내 흰밥과 바꿔먹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좋은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있어 후후 불어 먹을 정도로 뜨끈하고 찰진 잡곡밥을 점심시간에 먹을 수 있었다. 유정이와 밥을 지속적으로 바꿔먹으려면 내가 싸온 식은 흰밥 말고, 보온 통에 담긴 따끈한 흰 밥이어야 공평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을 먹는 유정이가 부럽다며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말했다. 아버지는 흰밥은 포기하지 못했지만 잘 갖춰 먹는 것에 있어서는 관대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아침마다 뜨거운 물을 넣어 새 보온 통을 데우고, 갓 지은 흰쌀밥을 가득 담아갔고, 그것을 점심시간에 유정이의 맛난 밥과 바꿔먹었다.
자취를 시작하던 때로 돌아가면, 잡곡밥을 위해 밥을 두 번 지을 필요도 없는 온전한 내 밥통이 생겼다. 그런데, 이 전기밥통은 처음 몇 번만 쓰이고, 금세 붙박이장처럼 가만히 있는 박제된 가전제품이 된다. 밥을 매일 지어먹지 않을뿐더러 타이밍을 놓치면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는 작은 엉터리 전기밥솥 안에서 밥이 누렇게 메말라갔다. 조금 더 방치하면 빨지 않고 묵은 걸레 냄새 같은 것이 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고, 바깥쪽부터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고심하다 어머니의 지혜를 빌어 한솥 지은 밥을 1인분씩 소분한 다음, 냉동실에서 꽁꽁 얼리고 정말 배고플 때 그것을 풀어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었는데 그럴수록 점점 밥 사랑은 식어갔다. 밥에 대한 여정이 길었다. 그만큼 쌀밥을 먹어 온 세월이 얼만가. 오래 돌고 돌아 쌀밥과 잡곡밥에 다시 안착할 수 있게 된 것은 앞 서 말한 서양 요릿집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누구든, 아니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매일 10인분 이상의 버터에 스테이크용 고기를 굽고, 기름에 볶는 파스타를 만들다 보면 그 냄새에 금세 물려 얼큰한 국물 요리와 쌀밥의 담백함을 찾게 될 것이다. 시큼하고 매콤 고소한 김치찌개와 각종 나물 반찬과 쌀밥! 기름지고 순한 음식이 과하면 맵고 짠 것이 당기고 맵고 짠 것은 그에 어울리는 담백한 쌀밥을 생각나게 하니, 밥상 위에 올라가는 음식의 조화를 생각하면 극단과 극단은 통하고 어떤 상 위든, 혹은 상황이든 균형이 중요하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밥을 노랗게만 만드는 작은 전기밥통 대신 "압력" 전기밥솥이 자리하게 되었고, 이 녀석은 기특하게도 곡물을 많이 불리지 않아도, 어떤 종류의 잡곡을 넣어도 물만 적당히 잘 맞추면 쫀쫀한 잡곡밥 혹은 쌀밥을 1시간 이내로 대령한다. 또한, 밤, 고구마, 연근, 은행, 하루 전에 불려놓은 콩, 말린 나물, 버섯 등의 채소 그리고 소금 조금을 잡곡과 함께 넣고 밥을 지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한 그릇 음식이 되어 매일의 나를 잘 먹일 수 있다. 현미밥 혹은 쌀밥은 어디를 배회해도 돌아갈 곳인 포근한 집처럼 매일 나를 간편하게 또, 편안하게 먹이는 음식이기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 공은 전적으로 작고 편리한 압력 전기밥솥에게 있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그 옛날처럼 가마솥으로 밥을 지어야 했다면 쌀은, 쌀밥은, 현미밥은 어릴 적 엄마에게 졸라도 얻어먹을 수 없던 그 잡곡밥의 자리에 고스란히 있었을 것이다. 엄마처럼 쌀밥을 매일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지 않지만, 매일 간편히 자신을 잘 먹이고 싶다면 4인용 이하의 작은 "압력" 전기밥솥을 구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권유해보고 싶다.) "압력"에 따옴표를 단 것은 부엌에 붙어있을 시간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압력 취사만큼 곡물을 익히는 데에 적절하고 편리한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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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영양 잡곡밥 조리법
준비물: 전기압력밥솥, 혼합잡곡, 현미 혹은 백미, 취향에 따라 마른 나물, 깐 밤, 고구마, 감자, 연근 등의 채소
수분과 곡물의 익힘의 조화가 아주 잘 맞는 잘 지은 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밥통의 성격을 잘 알아야 한다. 보통 물에 미리 잘 불린 흰쌀은 물과 쌀의 양이 1:1이다. 여기에 잡곡이 섞이면 물 조절이 들어가야 하는데, 베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오븐 테스트를 하듯 곡물의 물 양을 조절하며 질은 밥도 먹어보고, 꼬들밥도 먹어봐야 내 밥통이 어느 정도 물 양으로 어떤 상태의 밥을 짓는지 파악할 수 있다. 질은 밥은 질은 밥대로 부드럽게 먹고 꼬들밥은 꼬들밥대로 식감을 즐기며 먹되, 잘 익지 않은 꼬들밥이 되었다면, 리조또나 볶음밥용 밥으로 안성맞춤인 밥이 되었다 생각하며 프라이팬에서 볶거나 육수나 채수를 넣어 리조또를 만들어 먹자.
흰쌀은 따로 오래 불리지 않고 밥을 지어도 실패할 확률이 낮은 편이지만, 잡곡의 경우, 물 맞춤부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누구나 갖는 어려움을 쉽게 해결해주는 것이 상품 개발인가! 마트에 가면 불리지 않아도 되는 잡곡 제품이 다양하게 나와있다. 현미의 경우, 쌀알에 수분이 잘 흡수되게 하고 잘 익도록 하는 미세한 칼집이 들어가 있는 것이 있다. 콩이나 기타 혼합 잡곡류는 찌고 다져서 다시 건조하는 과정을 거친, 이미 한번 익힌 상태의 제품이 있다. 보리 중 압맥이란 것도 그렇다. 이런 제품들은 거의 백미와 섞어도 밥이 잘 되는 상품이다. 어머니가 알려준 물 맞춤법으로 밥 짓기를 시작했는데, 평평한 곳에 밥통을 놓고 잘 헹군 쌀이나 잡곡을 먹을 만큼 넣고 물을 붓는다. 보통 건조한 곡물이 밥솥에서 쪄지면 3배가량 불어나니 분량을 꼭 감안해서 밥을 짓자. 자작하게 곡물이 물에 잠기면 평평히 한 곡물에 손바닥을 대고 가운데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가 전부 잠길 정도인지 확인한다. 사람 손의 두께와 모양이 다르니 이 계량법은 아무래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익힐 수 있다. 가장 물량을 가늠하기 어려운 곡물이 백 찹쌀인데 찹쌀은 물이 조금 많으면 밥이 쉽게 질척거리고 끈적여져 보통의 밥에는 현미찹쌀을 쓰는 편이다. 잡곡 중 콩을 꼭 밥에 넣고 싶다면, 보통 아주 단단하게 잘 말린 콩이므로 반드시 밥을 하기 하루 전날 물에 잘 불려놓아야 한다.
혼합잡곡의 경우 다양한 곡물이 섞여있는데, 백미를 쓰지 않는 나는 현미와 혼합잡곡을 반반씩 넣고, 곡물의 양보다 1.5배 정도의 물을 넣는다. 물은 그냥 수돗물보다 끓인 물이나, 정수물이 좋다. 손등 수위로 치면 가운데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가 다 잠긴다. 시간이 있다면 물을 맞춘 곡물을 한 시간 정도 그냥 밥통에 둔다. 그리고 잡곡 모드로 취사를 하면 조금 더 부드러운 잡곡밥을 먹을 수 있다. 시간이 없다면, 바로 취사 모드를 누른다. 40~50분 정도의 취사 시간을 가지고, 밥이 되면 밥 솥의 뚜껑을 바로 열지 않고, 15분 정도 묵히는데, 그 시간 동안 곡물이 좀 더 익는다. 급하면 그냥 열어 먹어도 된다. 고구마나 말린 나물, 다시마, 껍질을 깐 밤이나 은행, 연근이나 우엉, 감자 등은 밥물을 맞추고 나서 먹고 싶은 만큼 잘라 넣는다. 곡물과 뒤섞어 주어도 되고 곡물 위에 얹어 밥을 해도 된다. 간이 베이게 밥에 소금 한 꼬집을 넣어주어도 된다. 말린 나물은 그대로 넣으면 물을 흡수하므로 물에 한번 헹구고 꽉 짜 수분을 조금 머금은 불린 상태로 넣는 것이 좋다.
밥은 빵처럼 지어지면서 고소하고 포근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감싼다. 모두 곡물이 익는 냄새다. 기름 냄새는 싫지만, 어쩐지 된장국과 밥 짓는 냄새만큼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다 지어진 소리를 듣고 조금 기다리다 열면, 알알이 익어 밥솥을 가득 채운 밥이 있다. 별다를 것은 없지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기분이다. 밥주걱으로 곡물이 뭉개지지 않게 살살 가장자리부터 주걱을 넣어 퍼서 밥공기에 먹음직스럽게 담고, 참깨와 제대로 만든 간장이나 소금 조금, 제대로 짠 참기름을 조금 뿌려 구운 김과 함께 먹으면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가득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니, 이건 아무래도 내 몸이 몹시 좋아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