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조선 왕릉
선릉은 조선 제9대 왕이었던 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른 점은 부속건물(홍살문,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능은 묘주가 1인인 단릉, 묘주가 2인이면서 봉분이 하나이며 합장릉, 한 곡장안에 봉분이 둘이면 쌍릉, 셋이면 연릉, 같은 능력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사용하면서 다른 언덕에 능을 만들면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선릉은 동원이강릉에 해당해서 능침과 부속건물이 일직선이 아닌 것이다.
정릉은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중종의 무덤이다. 연산군과는 이복형제로 중종이 동생이다. 차남이었기에 왕위 계승과 거리가 있었지만, 연산군이 폐위(중종반정) 되면서 조선 제11대 왕위에 오른다. 중종은 원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묻혔으나 제2계비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후 함께 묻히길 원해서 현재 위치로 옮겨온다. 그러나 풍수상의 문제로 합장되지 못하고 문정왕후가 태릉에 묻히게 되어 중종의 정릉은 단릉이다. 부부가 함께 묻히지 못하고 단릉인 것도 드문 예인데 태조의 건원릉과 단종의 장릉이 단릉이다.
선릉과 정릉은 서울 도심 한복판, 그것도 강남에 위치해 있다. 안내도는 하나의 섬을 표시하고 있는 듯하다. 도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실 내부 전각과 살구나무
재실은 제례의식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곳이며, 능역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다.
국왕의 장례 절차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왕이 죽고 나서 공식적인 장례절차가 끝나는데 27개월이 걸린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는 절차를 따랐다고 한다.
홍살문은 이 장소가 성역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정말이지 역할에 충실하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확대되는 도심의 팽창을 애쓰며 막고 있는 듯하다. 건물이고 장소고 정면에서 바라보고 다가가는 맛, 느낌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맛은 고사하고 성역을 지키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만의 문화재가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재인 것이다. 이 정도의 지위에 맞게 용어 정도는 통일되는 것이 맞다. 가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다.
정자각(丁字閣) - 정자 형태의 건물이란 뜻이다.
성종과 정현왕후를 위한 정자각으로 능침과 일직선에 놓여있지 않다. 한 묘역 안에 능침을 따로 두는 형태를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정자각이 어정쩡하게 위치하고 있다. 선릉은 임진왜란 당시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능이 파헤쳐 져서 시신이 불탔다고 하니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 후 지속적으로 복원되었는지 갖추어야 할 부속건물들이 다 있다.
제례 의식에 대한 설명
정자각 내부 건물 뒤로 문이 열리면 신도를 따라 영혼이 들어오는 구조
정자각에서 홍살문을 바라보면 꽉 들어찬 건물을 볼 수 있다. 현대식 건물들이 호시탐탐 능역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신로 - 왼쪽이 성종의 영혼, 오른쪽이 정현왕후의 영혼을 위한 길이다. 정현왕후가 서너배 힘들었겠다. 멀다.
예감 - 왼쪽이 선릉, 오른쪽은 정릉
예감은 제사에 쓰인 축문(종이류)을 태우는 곳이다. 느낌이 다르다. 선릉의 예감이 오래되었다고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정릉의 예감이 새롭게 복원하기는 했으나 정성이 없어 보인다. 기계로 뽑아낸 것과 정으로 심혈을 기울여 한번 한번 두드린 차이일 것이다.
비석 - 무덤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종 능역에서 바라본 정자각, 정현왕후 능역으로 가는 신로가 계속 이어진다.
선릉(성종) - 석물
선릉(성종) - 석물
선릉(성종) - 석물, 무인석, 잔디를 깎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들어가서 직접 만져보고 싶다.
선릉(성종) - 석물, 능침 정면이 혼유석이고 그 앞이 장명등이다.
선릉(성종) - 석물, 사진마다 보이는 길쭉한 석물이 망주석이다. 망주석은 영혼의 출입문 역할을 한다.
선릉(성종) - 석물, 무인석 뒤 좌우에 석마 한 쌍이 놓여 있다. 능침에 병풍석을 치고 난간을 둘렀다.
곡장 - 능침을 둘러싸고 있다. 정면 쪽만 개방되어있다. 새로 조성되었는지 깔끔한 담장 같다.
성종의 선릉은 능침에 병풍석을 두고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 12지신상을 새겼다고 하는데 마모 때문인지, 멀어서 인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석물들의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곡장 안에 능침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석양과 석호를 번갈아 두었고, 무인석 뒤에도 두 마리 석마를 둔 점에서 다른 조선왕릉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세조에 의해 금지되었던 병풍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인다. 할아버지 세조, 작은아버지 예종의 무덤에도 병풍석이 없다. 아들인 연산군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자각에서 시작된 신로가 정현왕후 무덤까지 연결되어 있다.
난간을 두루는 데 사용되었을 석주, 오늘날로 치면 폐건축 자재인데 근처에 묻는 것이 관례인지, 아니면 옮겨가는 것에 대한 꽤인지 궁금해진다.
선릉(정현왕후) - 병풍석은 없지만 망주석, 석양의 모습이 뚜렷해 보인다. 호랑이보다 양이 더 무서워 보인다.
선릉(정현왕후) - 무인석, 두 눈을 부릅뜨고 묘역을 지키고 서 있다. 더 이상 침범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표정으로 보인다. 등발도 만만하지 않다.
선릉(정현왕후) - 장명등,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석등이다.
선릉(정현왕후) - 곡장, 수막새 암막새에 봉황과 용이 새겨져 있다.
선릉(정현왕후) - 석양의 눈매가 무섭다. 반면 석호는 재미있어 보인다.
선릉(정현왕후) - 망주석의 세호(작은 호랑이) 망주석은 영혼이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선릉(정현왕후) - 무인석과 문인석,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선릉(정현왕후) - 무인석 뒤의 석마, 문인석 뒷모습과 무인석 뒷모습
선릉(정현왕후) -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지만, 다른 석물들의 보존 상태는 좋아 보인다.
성종릉, 정현왕후릉을 거쳐 중종릉 쪽으로 길을 잡으면 울창한 숲을 만난다.
정현왕후 능에서 중종의 정릉으로 가는 길
정릉 정자각에서 홍살문을 바라보면 도심의 빌딩 숲이 위협하고 있음을 더 느낀다.
정릉 - 비석과 비각
정자각 위의 잡상 - 삼장법사와 제자(?)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내가 모르는 기타 등등의 요괴들이 건물의 중요도에 따라 숫자를 달리한다.
정릉은 안타깝게도 개방되어있지 않다. 멀리서
홍살문 쪽에서 줌으로, 능침을 병풍석을 두고 난간석을 둘렀다.
중종의 무덤인 정릉은 단릉이다. 3명의 비와 9명의 후궁을 있었어도 죽어서는 외로이 혼자 묻혔다. 생각하기에 따라 참 재미있는 일이다. 정릉은 개방되지 않아 아쉬움을 주지만 선릉과 같은 공간에 있어 조선왕릉을 비교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선릉과 달리 홍살문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다. 정자각과 비각은 있으나 수복방과 수라간은 보이지 않는다.
왕이 승하하면 장례준비가 시작된다. 능침을 조성하는 데 동원되는 인원이 6000~9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동원된 백성들은 급료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농민들을 괴롭혔던 요역에 징발되는 것이다. 급료는 고사하고 먹는 것도 본인이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이런 호사를 누리며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참, 힘들었을 것이다. 죽는 날을 받아 죽는 것이 아니었기에 사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한참 노동력이 필요한 농번기였다면 농민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고생이 꼭 헛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조선왕릉 선릉과 정릉은 서울 한복판 그것도 강남에 위치해 있다. 도심 속에서 많은 시민들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왕릉을 찾을 때 조선시대 백성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한 더 이상 도심의 팽창으로 세계문화유산이며 우리와 후손들의 훌륭한 자연의 쉼터가 훼손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