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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Oct 24. 2016

영주, 소수서원에 가다.

조선의 서원이란?




조선의 서원(書院)이란?


세종 때부터 서원은 존재했으나 제사와 교육 기능을 갖춘 서원은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백운동 서원이 발전하게 되는 것은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국가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은 후부터이다. 사액이란 국가(국왕)가 현판을 내려주는 형식으로 국가가 정식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국가의 인정이란 것은 서원의 두 가지 기능 즉, 제사와 교육 기능 중 교육 기능에 대한 인정의 의미가 크다. 오늘날의 사립대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국가 공인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향교 등의 국립 교육기관이 쇠퇴하면서 서원은 발전하기 시작한다. 서원에서 공부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들을 사림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훈구세력과 대립한다. 네 번에 걸친 사화(사림이 화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선조 대에 가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 것이었다.
사림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후 서원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사림들은 정국 운영의 방향을 놓고 붕당을 이루는 데 이때 서원은 붕당의 기반 역할을 하게 된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시작된 붕당은 서인계 노론의 일당 전제화(독재)로 흘러간다. 노론의 주도권 장악 후 다른 붕당의 관리들은 관직을 빼앗기고 낙향하게 된다. 낙향 후 향촌사회에서 나마 지배세력 행세를 하기 위해 서원을 짓기 시작한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정리된 때 그 대상이 1000(혹은 600)여 개가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서원보다는 들어가는 이 길이 보고 싶어 왔는데 옛날 그 맛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아쉽다. 소나무로 대표되는 환경은 그대로인데 왜지? 내가 변한 것이겠지.


웬 당간지주?


입구를 따라 걸어가면 서원에서 보기에는 낯선 것을 마주하게 된다. 당간지주이다. 절집 초입에 있어야 할 것이 서원 입구에 딱 버티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유학)이 통치이념이 되면서 불교와는 앙숙(?)인데...
소수서원이 자리한 옛날에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집이 있었다. 폐사가 된 후 그 자리에 서원이 자리 잡았다고 하는 데 용케 살아남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 추정하고 있다.


영귀봉(靈龜峰)


서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봉우리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곳이 있는데 영귀봉(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죽계천과 취한대


소수서원 앞으로 흐르는 물을 죽계천이라고 부른다. 이 물줄기는 소백산에서 발원해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낙동강이 '녹조라떼' 라서 그런지 옛 모습이 아니다. 
취한대는 이황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데 열공하던 선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소수서원 전역은 풍광이 정말 좋다. 굳이 물을 건너 취한대에 가지 않아도 쉬고, 놀 마음을 먹는다면 어디라도 가능하다. ㅋㅋ


백운동(白雲洞), 경(敬) 자 바위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으로 시작했다.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서 나라로부터 사액(賜額/국가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음) 받아 소수서원이 되었다.
경(敬) 자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 숙수사가 폐사되면서 많은 불상들이 죽계천에 버려졌는데 그 불상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황이 공경의 마음으로 '경'자를 새긴 후 울음소리가 멈 췄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된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데 선비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40리를 흘렀다고 한다. 그 선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새겼다고 한다. 
실제로 소수서원에서 죽계천을 따라 40리를 내려가면 '동촌리' 라는 마을이 나온다. 현지인들은 그 마을을 '피끝' 마을로 부른다. 


은행나무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은 1543년이다. 수령이 500년으로 되어 있으니 서원이 지어질 때 심은 나무인 모양이다.


지도문(志道門)과 성생단(省牲壇)


지도문은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지도문 왼쪽 옆으로 잔디가 심어진 네모난 곳이 있는데 성생단이다. 성생단은 제사에 쓰일 가축을 검사하는 곳이다. 서울 종로의 종묘에 가면 돌이 깔린 성생단이 있다. 이곳 역시 종묘에서 제례의식을 행할 때 살아있는 가축의 상태를 검사했던 곳이다.


경렴정


경렴정 뒤편 역시 죽계천이 흐른다. 주세붕이 세웠다고 소개되어 있다.


강학당


서원의 기능은 교육과 제사이다. 강학당(명륜당)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강학당


강학당은 교육 기능을 담당했던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중요 건물의 품격에 맞게 기단을 쌓고 정면 4칸 측면 3칸 위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일신재 직방재


'재(齋)' 자가 들어간 현판을 단 건물은 오늘날의 기숙사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한 칸(기둥과 기둥사이를 한 칸이라고 합니다.) 씩 여러 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

지락재


역시 생활공간이다. 기숙사.


학구재


이 역시도 생활공간으로 기숙사.


사료관


장서각은 책을 보관하는 곳이다.


영정각
영정각 내부


이곳부터 제사 영역이다. 영정각에는 안향, 주세붕, 허목, 이원익, 이덕형, 주자 6명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문성공 묘(안향 묘)


서원의 또 다른 기능인 제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소수서원 주인공을 위한 공간이다.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원의 폐단은?


서원을 중심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 왕권은 크게 약화된다. 숙종 때 시작되어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탕평정책은 붕당의 폐단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신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림(노론)은 향촌사회의 여론을 장악하고 막강한 경제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은 서원은 특혜를 받았다. 국가가 사액(현판을 내림)을 할 때 노비와 땅 책을 함께 내려주었다. 서원 소유의 땅은 면세의 혜택을 받았고, 서원 소속 장정들은 면역의 혜택을 받았다. 또한 면역의 혜택을 노리고 일반 백성들이 서원에 투탁(스스로 서원의 노비가 됨) 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국가의 재정 상황은 날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영조와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 정리 사업이 이루어지는 근본 이유가 재정 악화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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