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이 죽은 이유는?
이유(李瑜)는 금성대군이고 이유(李瑈)는 수양대군,즉 세조이다.
요즘 아들이 아제 개그를 남발한다. 최근 것을 소개하면 엄마와 누나의 대화 중 '노르웨이' 나라 이름이 나오니 바로 "노루가 다니는 길은?" 하고 아빠를 쳐다본다. '노루웨이' 하고 철없는 아빠는 대답한다. 소금의 유통기한은? 1000일(염), 사우디에서 한국에 석유가 도착하는 기간은? 5일(Oil),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딸기실업, 꽃이 가장 싫어하는 도시는? 시드니, 신발이 화나면? 신발끈 등등 어디에서 들었는지 자신만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아들이 금성대군 신단에 도착하니 아제 개그 본능이 나온다. "이유(李瑜)가 이유(李瑈/함평대군-진양대군-수양대군)한테 죽은 이유는?" 하고 뿌듯해한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를 썼다. 뿌리 깊은 나무? 라는 사극에서 "'이도' 이놈!!! 이 나오면서 세종대왕의 이름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드리마 제목 "이산" 은 정조의 이름이다. 최근 우리 집 실세의 월화 저녁을 책임졌던 구르미의 주인공 효명세자의 이름은 '이영' 이다. 이렇게 외자를 썼던 이유는 왕이나 왕세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쓰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왕세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불경한 것이었고, 또 왕이나 왕세자의 이름을 빗대어 비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금 더 나아가면 경복궁의 두 번째 문인 흥례문의 본래 이름은 홍례문이었다. 하지만 고종 대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 청나라 '홍무제' 의 홍자와 겹친다고 해서 홍을 흥으로 고쳤다. 왕조시대였기 때문에 가려야할 것이 많았던 것이다.
작은 문의 안쪽 위에 홍살을 놓았다. 제사를 드리는 신성한 곳임을 말해준다.
재실은 제단을 관리하고 제사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제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금성단(錦城壇)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사사된 금성대군 이유(李瑜)를 위해 지어진 제단이다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세종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세종과 정비(본 부인인 왕후)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여섯째인 금성대군을 아꼈는지, 아니면 다른 형제보다 부유했는지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궁궐을 대신에 금성대군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행궁 행차나 피접(휴가?)을 나갈 때면 세손(단종)을 금성대군 집에 머물게 했었다. 단종에게 금성대군은 다른 삼촌과는 다른 특별한 관계였을 것이다.
아버지 세종의 유전자 덕분인지 하나같이 잘난(?) 아들이었다. 첫째인 문종은 아버지를 꼭 빼닮았고, 둘째 수양은 무문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수양과 라이벌(?)이었던 셋째 안평대군은 예술(시, 서, 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세종의 태평성대에 한몫을 담당하였다.
여섯째인 금성대군도 세종 대에 화포 개발 및 시험 등 중책이 맡겨진 것으로 보아 나름의 능력이 있었을 것인데,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에는 성격이 포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종, 세조실록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글을 만날 수 있다.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옥의 티'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조 찬양 일색이라는 점......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이고, 직간접적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금성대군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처음으로 유배된 곳은 삭령(경기도 연천)이었다. 그 후 여러 곳으로 옮겨가며 유배생활이 계속된다.
유배생활이 지속되던 중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사육신(死六臣/교과서 상의 육신)이 일으킨(사실은 계획만 했지 실행하지는 못함)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이곳 영주(조선시대 순흥부)에 위리안치(감금) 당한다.
이곳 영주에서의 생활은 길지 못 했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상왕의 지위를 잃음) 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자 순흥부(영주)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계획하게 된다. 이것 역시 실행되지는 못한다. 관노(비)의 고발로 발각되어 반역죄로 처형된다. 32세였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 맞다. 하지만 촌수가 꼬이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죽임을 당한 방석(태조 이성계와 계비 신덕왕후 사이의 둘째 아들)의 봉사손(제사를 모시기 위해 방석의 후손이 됨)으로 출계했다는 기록이다.
세종과 금성대군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1촌이다. 하지만 방석의 봉사손이 되면서 세종과 금성대군은 5촌 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방석이 자손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배려였다. 방석이 죽임을 당할 때 죄목은 역모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2대가 지나면서 용서(?)가 된 것이다.
세조 이후 조선의 왕통은 세조의 직계가 차지하게 된다. 금성대군의 행위(단종복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방석처럼 쉽게 용서되지 않았다.
이곳 영주에 금성대군신단이 마련된 것은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대의 일이고, 영조, 정조 대를 거치면서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는 말로 금성대군은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세조의 행위가 부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집권자 모두가 공범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크고 작은 사고가 지속되고 있다. 개선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세월호, 메르스, 지진 등이 이어지고 있고,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한 태도는 지속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공권력 남용을 넘어선 국가폭력에 의해 한 농민이 목숨을 잃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감추려는 자가 범인이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하나 더 해 "가만히 있는 자! 공범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참 부끄러운 사회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