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무엇일까요?
사극의 주인공을 통해서 세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가령 "조선 태종 이방원과 장희빈 역할을 했던 배우가 누구지?" 라는 질문에 '유동근, 전인화' 부부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면 적어도 40대 이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아인과 김태희' 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늘 야경의 마지막 코스인 '안압지'(40대 인증)도 언제부터인가 '동궁, 월지' 로 소개되고 있다. 경주는 1000년 고도답게 여행과 답사를 위한 안내가 잘 되어있는데 안압지는 월지, 동궁(구 안압지)이라고 쓰여있다. 연식이 좀 된 분들을 위한 배려. ㅋㅋ
안압지에서 월지, 동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역사적 고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경주 발굴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안압지(월지)에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안압지(雁鴨池)였다.
1970년대 이후 월지(月池) 발굴 조사에서 삼국사기 기록이 사기? 가 아님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고 고증 절차를 거쳐 본래 이름을 찾은 것이다.
동궁 추정지에 일부 건물이 복원되어 있고 나머지는 초석을 두어 건물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낮에 매표를 하면서 야경을 즐기기 가장 좋은 시간이 8시 경이라고 들었다. 첨성대에서 월지로 이동하는 중간 '길양이' 를 만나 시간을 보내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다.
입구는 한산해 보이지만 안쪽은 이미 낮에 박물관을 점령했던 그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동궁, 월지 야경
친절한 관광해설사분이 알려준 포토존에서 찍은 야경이다. 조명을 받은 건물이 못에 그림자를 만드는 데 그것을 꼭 찍어야 한다고....
월지의 축대는 현대에 복원된 것이나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축제술과 연못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월지(안압지)
고대의 삼국은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삼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 일본의 '아스카 문화' 이다. 백제가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고, 고구려와 신라도 한몫을 했다.
당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대표적인 것이 조선술과 축제술이다. 제방 쌓는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에는 '한인의 못' 이라는 이름까지 생겼다고 한다. 월지의 제방 쌓는 기술이 전해졌을 것이다.
주령구는 안압지(월지)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14면체 주사위와 유사한 놀이기구로 각 면에 벌칙? 이 적혀있는데 해석의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복불복 혹은 미션 수행 놀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리집 실세와....
작년 봄에 찍은 사진이다. 낮도 괜찮았다. 아니 실세와 함께라서 더 좋았다. ㅋㅋ
숙소(화랑게스트하우스/좋았다/조용, 깨끗)에 돌아와 안압지가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찾아보았다. 삼국통일 전후로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674년이면 백제와 고구려와의 통일 전쟁은 끝났으나 아직 당나라와 전쟁 중인 시기이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전쟁이 지속된 것이다. 국운을 건 전쟁을 수행하면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가능했을까? 그만큼 국력이 강했을까? 그러면 당나라는 왜 끌어들인 걸까? 하는 여러 생각을 해 보았다.
신라는 통일을 이룬 후 100년간 크게 발전한다. 바다 건너 일본의 침략이 골칫거리로 남았지만 당나라와의 관계도 회복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의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내리막길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절유택(사계절 별장), 금입택(금을 입힌 집)이 지어졌다. 백성들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었지만 귀족들은 산천을 경계로 하는 토지를 소유했다.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독점한 신라의 귀족들은 주령구를 던지며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서서히 망국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