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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Nov 01. 2016

세계유산, 창덕궁에 가다.

인정전!




창덕궁에 대하여

  

창덕궁은 조선의 이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이 태조 이성계의 작품이라면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의 작품이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250여 년간 사용된 것에 비해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시기를 제외하면 궁궐로서의 지위가 계속 유지되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어진 궁궐이기 때문에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고 강조하지만 실제 궁궐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궁궐이었고, 그만큼 조선 역사의 중요 장면들과 함께한 궁궐이었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왕조가 몰락한 것이다. 창덕궁 역시 이때부터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훼손되기 시작한다. 각종 전시장으로 이용되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고, 편의시설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려 나간다. 
1999년 본격적인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금천교와 진선문 사이


궐내각사 영역을 코스에 따라 관람하고 출구로 나오면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에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된다.


진선문과  금천교

진선문과 금천교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와 비교해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직선상에 놓여야 하는데  약간 어긋나 있다. 진선문을 통과하면 보이는 숙장문과 축을 맞추기 위함인지 생각 없는 복원인지 모르겠다.
어차고로 쓰이다가 현재 매점(기념품 가게)이 되어버린 빈청에 가면 저렴한 가격에 보급형 동궐도를 구입할 수 있다. 몇 천 원이 아깝다면 매점 안의 벽면에 동궐도 사진이 있다. 여기서도 확인 가능하다.
궁궐을 사실감 있게 혹은 재미있게 보려면 궁궐도를 미리 보고 가는 것이 좋다. 경복궁을 그린 북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가 남아있는데 과거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진선문 안, 홍살이 부시의 보호를 받고 있다.

한복 입은 외국인들


국내 유행에 맞추어 한복 입은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창덕궁 어느 곳을 배경으로 셔터를 눌러도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금천을 가로지르는 금천교 위가 인기다. 아쉬운 것은 금천에 비단결 같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청

호위청
상서원

  

진선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궐내각사 영역을 완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진선문, 인정문, 숙장문 세 개의 문 안에 궐내각사가 존재한다.
정청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일하던 기관이다. 이조와 병조의 출장소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호위청은 국왕 호위부대가 머물던 곳이다.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들의 군사적 기반이라고 전해진다. 군사를 일으켜 집권했으니 그 무서움을 알았을 것이다.

상서원은 옥새와 마패 등을 관장하면서 각종 서류를 관리하던 관청이다.
현재의 모습은 1988년 복원해 놓은 것인데 완벽한 복원이 아니다. 관청이 꽉 차 있던 본래의 모습은 행랑이 아니라 벽면과 문이 있는 행각이었다. 관청이 있으면 관리가 근무했을 것이다. 뻥 뚫린 공간에서 물건을 보관하고 근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12년 일제가 이곳을 전시장으로 사용하면서 벽체를 걷어내고 화단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랑에서 사진을 찍는다. 멋스럽게 나온다. 사진을 찍는 것은 좋지만 옛날 이곳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하면서 찍었으면 좋겠다.


숙장문


성종 때 서거정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숙장문 일대도 일제시대 모두 헐리는 수모를 당했다. 


인정문


진선문과 숙장문 가운데에 인정문이 있고, 그 앞에 넓은 터가 있다. 넓은 곳에 무엇인가 있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곳은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왕의 즉위식이나 왕실의 잔치가 열리던 곳이었다. 특히 왕의 즉위식이 인정문 앞에서 열리고 인정문을 통과해 인정전으로 들어가 용상에 앉음으로써 왕이 되었다.
왕의 즉위식은 몇몇을 제외하고 선왕의 상중에 열렸기 때문에 격식을 갖추면서도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조정


인정문을 통과하면 박석이 깔린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이 조정이다. 조정에는 품계석이 놓여있다. 품계석은 끼리끼리 몰려 붕당을 일삼던 신하들을 분리하기 위해 정조 대에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자금성에도 품계석이 있는데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자금성의 품계석은 고정식이 아니라 이동식이라서 행사가 있을 때만 세워다고 한다.


인정전

인정전


창덕궁의 법전(정전)인 인정전은 외관상 2층 구조이고 내부는 터진 1층 구조다.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는 모습은 경복궁의 근정전과 닮았지만 둘레의 서수나 정은 없다. 이궁(보조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인정전 4분합문과 3분합문

인정전 3분합문


분합문이란 문짝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문을 말하는데 가운데 부분은 문짝이 네 짝이고 나머지는 세 짝씩이다. 문짝의 색깔이 노란색인 것은 고종으로부터 양위(?) 받은 순종(황제)이 머물렀기 때문인 듯하다. 


답도


답도에는 2마리 봉황이 새겨져 있는 데 훼손 정도가 심하다. 보호를 위해 관람 동선을 측면 월대로 하고 있다. 


인정전 내부


내부에 단을 만들어 어좌를 놓았다. 어좌 뒤에는 곡병과 일월오봉도가 놓여있다. (일월오봉도는 일월오악도라고도 부른다. 일월오봉병 또는 일월오악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도' 와 '병' 의 차이다. 그냥 그림인지 아니면 그 그림이 병풍 형태인지를 구분하는 표현인 것 같다.)  어좌 위 공간에 설치된 구조물은 닷집이라고 부른다.


인정전 천정의 봉황


목각한 봉황에 황금색을 입혔다.   


인정전 내부


대한제국 시기 인정전 내부를 수리하면서 개조되었다. 전등이 설치되었고, 바닥은 전돌이 아닌 마루가 놓였다. 여러 가지 장식물을 황금색으로 치장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한 듯하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운명과 같이 많이 퇴색되었다. 황금색이라기보다는 누런색에 가깝다. 


인정문과 인정전의 오얏꽃 문양


인정문에 세 개, 인정전에 다섯 개의 오얏꽃 문양이 용마루에 박혀 있다. 대한제국 시기부터 사용한 문양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두고 말이 많다. 대한제국 시기부터 황실의 문양으로 사용했다는 주장과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이씨의 왕조(한 가문)로 폄하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주장이다. 




오얏꽃에 대하여


오얏은 과일나무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두를 이야기하는데 자두와는 다르다. 모양은 자두와 비슷하나 크기는 작은 자두보다 더 작다. 지금은 사라진 고향 동네에 딱 한 그루가 있었다. 한 명밖에 없는 동갑내기 친구 집에 있었기 때문에 매년 맛볼 수 있었다. 잘 익은 자두가 단 맛이 강하다면 오얏 열매는 신맛이 강하다. 신맛을 좋아하는 내게 딱 맞는 과일이었다. 세종시가 들어서면서 고향 마을이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은 맛볼 수 없다.
이화 문양! 이화(梨花)는 배꽃이다. 성씨로 쓰는 이(李)는 오얏의 이화(李花)가 피는 나무, 오얏나무 이(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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