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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Oct 31. 2016

세계유산, 창덕궁에 가다.

궐내각사!




창덕궁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이유!


일반인이 집을 지을 때도 터를 보기도 하고, 방향을 따지기도 한다. 궁궐을 지을 때도 기준이 있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내려오는 주례(周禮)라고 하는 책의 고 공기(考工記) 편이 그것이고, 이 원칙을 지켜가며 지어진 궁궐이 조선의 법궁 경복궁이다. 
하지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법궁인 경복궁이 아니라 이궁인 창덕궁이다. 그 이유는 주례의 기본 원칙을 따르면서도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조화를 택했기 때문이다. 방문객 수로 따지자면 경복궁이나 덕수궁이 많겠지만 모두를 방문하고 인상에 남는 궁궐을 선택하라고 하면 창덕궁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지어진 본 건물이 아니라 대부분 1991년부터 시작된 복원 사업으로 다시 태어난 건물이다. 그러나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하게 지니고 있고, 한국 전통의 조경이 후원에 살아있다는 평가를 얻어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돈화문 밖과 안


창덕궁의 정문이다. 2층의 태극무늬와 정면이 5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창덕궁 창건 당시 이미 종묘가 창덕궁 앞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궐의 남쪽이 아닌 서쪽 끝에 놓이게 된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서 정전인 인정전으로 갈 수 있다. 
경복궁 앞에 6조 거리가 있듯이 돈화문 앞에서 종로까지 관청가가 조성되어 있있다.  


회화나무


돈화문을 통과하면 수령이 300~400년에 이르는 회화나무가 좌우에 있다.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궁궐을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회화나무는 학자 나무로도 불리는데 궁궐 외에도 학덕이 높은 선비가 사는 마을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도 궁궐 정문 안쪽에 회화나무나 느티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천교와 진선문

금천교와 금천


창덕궁 금천교(禁川橋)의 이름은 금천교(錦川橋)이다. 금천교 본래의 뜻은 '금하다' 는 뜻이다. 창덕궁의 금천교는 '비단 금' 을 쓴다. 비단 같은 물결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자연수는 흐르지 않는다. 비가 와야 그나마 물을 볼 수 있다. 당연히 비단 같지도 않다. 참고로 경복궁은 영제교, 창경궁은 옥천교, 덕수궁은 금천교(禁川橋)이다.

내각(궐내각사)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이곳을 통과하면 정면으로 규장각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관청은 궁궐의 출입문 앞쪽에 위치한다(궐외각사). 그러나 궁궐 안에 위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관청과 밖에 있는 관청의 출장소 격의 관청들이 대거 궁궐 안에 위치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없는 궐내각사 영역이 잘 복원되어 있다


규장각


어느 것이 진짜 규장각일까? 현재 규장각은 세개이다. 창덕궁 궐내각사에 위치한 규장각,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 년에 설치한 것으로 창덕궁 후원에 만들어졌다. 2층 건물로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은 주합루로 불렀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고종 때 궐내각사로 옮겨지게 된다. 서울대학교에 규장각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와 관련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규장각의 도서를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했는데 1946년 서울대학교 개교로 도서의 일부가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었다. 이를 전시 보관하는 곳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라고 부른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왕권 강화를 이루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문을 연구하는 왕실도서관이라는 기본적 성격을 벗어나 정사에 관여 하고 왕의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규장각 출신 관료들은 정조 대 왕권 강화의 선봉에 서게 된다.


검서청


검서청은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규장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검서관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머물며 일하던 공간이었다. 검서관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검서관직을 역임했다. 


책고


책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선원전


선원전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산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공간인 것이다. 현판이 없어도 찾아올 수 있단다. 그래서 종묘의 여러 건물에도 현판이 없다. 
창덕궁에는 선원전이 하나 더 있다. 신선원전이라고 불리는데 일제강점기 임금들이 선원전을 찾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창덕궁 북서쪽에 하나를 더 지었다. 


양지당


  임금들이 선원전에 갈 때 머물던 건물이다. 이곳에서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조상을 만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약방


내의원으로 알고 있는 약방이다. 왕과 왕실의 건강을 책임졌던 곳이다. 현재 건물은 새로 지어진 것이고, 1917년 화재 이후 창덕궁 복원 과정에서 약방 건물 중 일부가 헐려 성정각으로 옮겨졌다. 현재 성정각에 약방의 흔적이 남아있다.


연가


연가는 연기가 나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창덕궁의 터는 평지가 아니다. 지형을 살려 건물을 짓다 보니 공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굴뚝을 따로 두지 않고 건물의 담을 이용했다. 


옥당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라 불리었다.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집현전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없어지고 집현전의 기능을 예문관이 맡아보다가 성종 때 홍문관이 학술 언론 기관으로 위상을 갖추게 된다. 


금천교의 서수


금천교 아래쪽 남쪽에는 해치, 북쪽에는 거북이 놓여있다고 한다. 그러나 해치의 모양이 해치와 비슷할 뿐 해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북쪽의 거북이 역시 의심받고 있다. 이럴 때는 그냥 '서수'하면 된단다. 


진선문


궐내각사를 둘러보고 나오면 금천교와 진선문 사이에 서게 된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사람들이 칠 수 있는 큰 북이 달려있었다고 한다. 왕이 듣고 와서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얘기인데, 어디 감히 일반인이 돈화문을 통과하고 금천교를 건너왔겠는가? ㅋㅋ 백성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는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겠다. 
태종대에 처음 설치되었고,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북을 신문고 또는 등문고라고 불렀다.




궁궐에 대한 인식


창덕궁은 교육 현장으로 다른 궁궐보다 좋다. 이유는 궐내각사를 다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한창 중건 중이다. 바람직한 일이나 왕의 영역에 치중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궁궐에 대한 편견을 심어 놓기도 했다.
창경궁 통명전 앞 마당을 보수하면서 많은 저주물이 발굴되었다고 전해진다. 사극에서 보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여인들의 모습이 많이 그려진다. 이는 궁궐이 한 나라의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을 희석시키고, 왕의 후사를 놓고 암투를 벌이는 장소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일본제국주의 침략기부터 심어놓은 인식이다.
창덕궁에서 궐내각사를 보면서 하나하나의 정치적 기능을 설명한다면 궁궐의 기본 기능이 국가의 운영, 즉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임을 쉽게 인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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