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에, 누가 주더라면서 편이 뒤꼍 축대 위 곤드레 좁은 밭 구석에 목화씨를 몇 알 심었다. 그게 잘 자라서 며칠 전부터 하나 혹은 둘씩 꽃을 송이로 가지에다 건다.
색의 변화
그런데 가만 보니, 그게 그저께는 미색이었는데 어제는 분홍이더니 오늘은 진홍이다가 다음 날 보니 꽃이 사라지고 없다. 유소년 시절의 동네 인근 목화밭의 꽃색 이미지나,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문익점 목화 시배지의 제철 목화밭 방문에서 본 목화꽃 이미지는 변색하는 게 아니라 미색 하나 단색이었다. 그래서 목화가 이런 변색 과정을 거쳐 마지막엔 하얀 목화송이로 된다는 걸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래서, 새삼 발견한 목화꽃의 변색 현상에서 '만물의 변화 불가피성'과 '시간의 흐름'을 거듭 인식하게 된다. 목화꽃의 시간에 따른 단계별 변색은 세월 속에서 변해 온 몇 단계 내 삶의 양태도 곱씹어 보게 했다. 내 긴 세월 삶에도 몇 단계 반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반전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룬 게 아니라 그 반전의 계기가 내게 다가와서 나를 바꾼 거였다. 그래서 목화꽃 변색은,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러운 변화의 흐름에 순응하기를 잘했다고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어찌 보면 너무 소극적인 자세이긴 하지만.
목화꽃의 변색 현상에서 '아름다움의 다양성'도 본다. 목화꽃의 미색에서 분홍색, 나아가 붉은색으로의 변화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음을 내게 깨우쳐 준다. 변화는 이렇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나의 걸음은 이제 빠른 걸음에서 느린 걸음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늙음의 단계에서 노쇠의 계단으로 내려서고 있다. 그런 나, 그래도 나는 이 변화의 계단에도 나름 미적 가치가 없지 않다고 목화꽃의 변색은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이를 일러 노쇠의 미학이라고 말한다면 남들이 "꿈에서 깨어나라"라고 비웃지나 않으려나 모르겠지만.
목화꽃의 변색은 수정과 씨앗 형성 과정의 일환이다. 이는 사람의 '성숙과 성장' 과정이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변화는 성숙과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거"라는 노래를 만든 이도 목화꽃의 변색 과정을 유심히 보았던 건가?
목화꽃의 변색 과정에서 난 '적응의 중요성'도 봤다. 환경에 맞게 적응하고 변화한다는 것 즉 유연성과 적응력은,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렇게 하기 쉽겠는가만은, 도약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선 가져야 할 자세인 것 같다.
자랄 때 우리가 '미영'이라고 부른 목화는 변화 불가피성과 시간의 흐름, 아름다움의 다양성, 성숙과 성장, 적응의 중요성 등을 화두로 던지고는 피었다가 금방 사라져 간다.
형체의 변화
이제 꽃은 다 지고 목화(송이)만 남았다. 먼저, 꽃, 미색에서 분홍, 연분홍에서 진분홍으로. 그러다가 꽃에서 다시 목화다래로. 마지막으로, 다래에서 솜 송이로의 목화 변신의 전 과정을 이번에 비로소 목격했다.
상징
‘목화’라는 제목의 시를 발견했다 : 어제까지 내린 비에도 / 운전 잘하고 비 안 맞고 다녔습니다 / 보일러도 좀 틀어서 방도 눅눅하지 않고요 / 사무실에 에어컨 틀어서 더운 줄 모릅니다 / 식사도 세끼 잘 먹고 / 어디 아픈 데 없이 운동도 열심히 하고요 / 일은 좀 바쁘지만 하루 이틀 하던 게 아니니까. / 늘 물어보시던 것들 / 제가 먼저 전합니다 / 아무 걱정 마시고 그저 편히 쉬시면 돼요, 어머니.
최정남이라는 분(시인)이 쓴 시다. 목화, 목화꽃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간접적인 암시조차도 전혀 없는데 제목은 버젓이 '목화꽃'이다. 하지만 울림이 있어 이 글과 뒤꼍의 저 꽃을 번갈아 서너 번 봤다. 제목과는 동떨어진 내용의 이런 시를 발견하면 난 꼭 음미한다. 이 시에서 목화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