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6水
여기 산기슭 내 처소인 길뫼재에 오르는 길의 마을 끝자락 어느 집 대문 옆 담, 그 담벼락에는 금낭화가 피어 있고 담 안에는 아주 일찍 핀 작약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땅에서 핀 게 아니라 돌담 담벼락에 핀 금낭화, 그 집 대문이 오랫동안 열리지 않아서 그 꽃은 내 눈에 더 뚜렷하게 띄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15여 년 전, 내가 이곳과 인연을 맺은 후 주말마다 내려와 차밭을 일구고 있을 때, 우리 밭 길뫼재 뒤로 오르내리는 서너 분 중에 할머니도 한 분 있었다. 그때로서는 아직 노쇠하지 않았던 할머니,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뒷산의 자기 영감님 산소에 오르내리는 거였고 경운기 사고로 지구를 먼저 떠나셨다는 얘기는 나중에 내게 들려주었다.
뒷산을 오르내리면서 가끔 길뫼재 언덕에 발걸음 멈추고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내려가시곤 하던 할머니, 그 할머니의 뒷산 발걸음도 해를 거듭할수록 뜸해졌다. 나중에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 까꾸막 영감님 산소길 오르내리는 것도 마을회관 출입도 불가능해져 아예 집안에 들어앉으신 것 같았다. 그때부터 할머니가 마을 길에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팡이를 두 개 짚고 문밖에 나왔다가 나랑 마주치면 내가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시던 할머니, 그러다가 나중에는 담 안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더러는 자주, 승용차가 그 집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할머니도 방에서 자녀들의 방문을 받으면서 잘 계시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집 대문이 열리지 않고 대문 앞에 가끔 와서 서 있던 승용차도 서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내가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담벼락에 핀 금낭화와 닫힌 대문의 구도는 그 뒤로도 내 시선을 강하게 끌었다. 마침 아래 밭의 다른 할머니와 마주친 김에 그 할머니 근황을 물어봤더니 이럴 수가, 하늘나라로 가신지 제법 되었다는 거 아닌가.
금낭화 담벼락 집은 그 할머니 집이었다. 그 할머니, 생각난다. 안팎으로 고우셔서 편과 내가 '곱단이 할머니'라고 호칭했던 할머니, 아마 뒷산 영감님 곁에 묻히셨을 거다. 주인이 떠난 집, 늘 반쯤 열려 있던 대문이 이제는 닫힌 집 담벼락에 핀 금낭화가, 핀지 제법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지지 않고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있다. 작약은 담 밖을 내다보고 있고. 우리 집 작약은 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가신 할머니 집 마당 작약은 일찍이도 피어서는.
벌써 가신 할머니께 늦었지만 삼가 하늘의 평화를 기원한다. 금낭화와 작약이 집을 잘 지키고 있더라는 말도 함께 드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