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박각시나방
벌새
우리 여기, 벌새가 많다. 봄에 꽃댕강이 피면 벌새들이 벌떼(?)처럼 모여든다. 지금은 봉숭아, 플록스, 무궁화가 벌새들의 순례 포인트다. 그런데 우리 집 무궁화는 왜 이제야 피는 거지?
벌새에 관한 자료를 찾다 보니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D.H. 로렌스의 ‘Hurmming Bird 벌새’라는 시가 찾긴다. 난 벌새가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로렌스의 시라니.
난 상상할 수 있다. 태초에 벙어리 된 / 어떤 다른 세계에 가 있음을. 숨 할딱이며 윙윙거리기만 하는 / 그 가장 장엄한 정적 속으로 멀리 돌아가 있음을 / 벌새들은 가로수 길을 쏜살같이 날아갔다 / 그 어떤 것도 영혼을 갖기 전에 / 생명이 반쯤 무생명인 물질의 융기였을 때 / 이 작은 조각이 광휘 속에 떨어져 나와 / 즙이 느리게 흐르는 커다란 줄기 속을 윙윙거리며 지나갔다 / 그때에는 꽃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 벌새가 창조에 앞서 번쩍이던 세계에서는 / 벌새가 그의 긴 부리로 느린 채소의 엽맥을 찔렀으리라 생각된다 / 어쩌면 벌새는 컸을 테고 / 이끼와 도마뱀이 한때는 컸다고 말들 하듯이 / 어쩌면 벌새는 마구 찌르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을 것이다 / 우리는 시간의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벌새를 본다 / 우리들에겐 다행이지만
벌새란 이름은 벌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졌으며 1초에 19~90번의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날아다니는 힘이 강하며, 벌처럼 공중에서 정지하여 꿀을 빨아먹는다. 꿀벌보다 더 부지런히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벌새, 오늘도 여러 마리가 부지런히 꽃 순례한다.
착각한 벌새
여기 길뫼재 사방(四方) 중 일방(一方)을 담당하는 꽃댕강울타리에 이때쯤이면 벌새들이 찾아와 꽃송이에 안테나 같은 주둥이를 들이대어 꿀을 빤다. 몸집이 새라고 하기엔 너무 작지만 벌보다는 훨씬 크고 고도의 날갯짓을 하고 또 그 빠른 날갯짓 소리가 허밍 같기에 난 당연히 벌새(humming bird)인 줄 알고서 누가 물어보면 그건 "벌새"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것 봐라,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 그건 벌새가 아니라 '꼬리박각시나방'이라고 하는 넘이었다.
한국에는 벌새가 없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생긴 모양이나 날렵하게 비행하는 모습이 벌새와 별반 다르지 않기에 사람들은 박각시나방을 보고서 벌새 봤다고 착각한다는 거다.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였다. 여기가 예이츠의 이니스프리는 아니지만 이니스프리에서처럼 벌새들이 붕붕 허밍 하는 곳이라고 글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벌새가 아니라 박각시나방들이 비행하는 곳이긴 하지만 여긴 좋은 곳임은 오늘도 새삼 느낀다. 지금 요 근방, 진주나 사천 지방에는 지난 장마 이후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고 그 지역의 농사 지기들이 아우성이다. 그런데 박각시나방이 춤을 추는 길뫼재 여기는 그저께와 어제께 밤에 제법 많은 양의 소나기가 연이어 퍼부었다. 지난 장마 이후 적절한 간격으로 비가 내렸다.
8.15 광복절은 지나갔지만 끊이지 않고 계속 피고 있는 무궁화를 새삼 바라본다. 이 무궁화 꽃송이 앞에서도 박각시나방들이 벌새인 듯 춤을 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