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다. 이거 다 읽으면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것이고 그다음엔 『채식주의자』를 읽을 참이다. 이 작가의 다른 책은 위의 책들을 다 읽은 후 선택할 것이고.
내가 처음 접한 한강의 작품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붉은 꽃 이야기』이다. 읽게 된 계기는 지인인 어떤 출판사 대표의 내 글에 대한 평가, "당신의 글은 시설(詩說), 레시 포에티크 풍이니 이런 글쓰기가 당신에게 어울린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레시 포에티크로서의 붉은 꽃 이야기를 읽은 소감을 난 나의 세 번째 산문집 『언제나 강 저편』314~315 페이지에 수록했었다. 그걸 여기 옮겨본다. 작가 한강의 글에 대한 첫인상을 말해보기 위해서이다.
내 글을 관심 있게 읽어주는 출판사 대표 지인이 ‘레시 포에티크(Recit Poetique; Poetic Story)’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권유한다. 처음 듣는 개념인지라 자료를 찾아보니 시와 소설이 어우러진 새로운 장르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말로는 ‘시설(詩說)’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소설가 한강의 『붉은 꽃 이야기』이다. 붉은 꽃 이야기는 남매 이야기다.
누나 선이는 일곱 살, 동생 윤이는 네 살. 동생 윤이는 흰 꽃(흰 등)에 끌렸고 누나 선이는 붉은 꽃(붉은 등)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슨 꽃이 가장 예쁘냐고 선이가 소곤소곤 묻자 윤이는 고개를 쳐들고 경내를 돌아본다. 저기 하얀 꽃 예쁘다고 말한다. 듣고 있는 줄 몰랐는데 옆에 섰던 어머니가 나무라듯 잘라 말한다. 그건 영가 등이라고, 죽은 사람들에게 달아주는 등이라고.
한강의 작품 붉은 꽃 이야기
선이가 붉은 꽃을 본 것은 막 시작된 경내 연등 행렬에서였다. 예닐곱 살 어린애의 몸집만 한 붉은 연등이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그것들은 마치 나름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그것은 고요히 앞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뜀박질을 멈추며 선이는 숨을 할딱거렸다. 한 사미니가 그것을 들고 나아가고 있었다. 사미니가 가는 방향으로 그는 고개를 빼보았다. 긴 연등 행렬의 끝이 보였다.
식구들이 찾는다는 생각을 일순 잊은 채, 그는 홀린 듯 윤이의 팔을 끌고 그 커다란 꽃을 향해 나아갔다.
봄 가고 온 가을 어느 날, 네 살 윤이는 녹슨 못을 밟는다. 이틀 낮과 밤을 헤매다가 깨어나지 못한다. ‘내 동생 윤이는 어디서 왔느냐’고 온 곳을 묻다가 쥐어 박히곤 했던 선이는 ‘내 동생 윤이가 어디로 갔느냐고’고 이번에는 간 곳을 묻는다.
칠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수학선생의 지적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선이는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간다. 오른뺨을 맞았다.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똑바로 바라본다고 이번에는 선생이 왼뺨을 때렸다. 얼굴을 들어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양 뺨을 번갈아 맞았다. 그때마다 얼굴을 바로 들었다. 손바닥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선이가 넘어지자 슬리퍼 신은 선생의 발이 그의 등짝을 밟았다. 일격이 가해질 때마다 그는 고개를 곧추 들어 선생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나가라고 했다. 당장 나가라고 했다. 떨리는 손으로 선생은 교실 앞문을 가리켰다. 선이는 나왔다. 수돗가에 가서 코피를 닦던 선이, 아랫배가 뜨거워 옴을 느꼈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속옷이 젖은 것을 알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코피를 흘렸다. 육교를 건넌다. 아랫도리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시멘트 바닥에 동전 같은 자국을 남긴다.
네 번째 겨울 안거를 마치고 암자에서 열흘을 보낸 뒤 그는 걸망을 메고 떠난다. 걸망에는 풀 먹인 가사와 발우, 속옷과 양말을 담았다. 늦은 겨울의 청랭한 빛이 드는 아침이었다.
산문에서 그는 자목련 한그루를 본다. 잎사귀도 꽃도 잎눈도 없는 앙상한 나목이다. 오래전 상행자와 함께 장을 보러 읍내에 오르내릴 때마다 올려다보곤 했던 나무다. 그는 꼭 한번, 밝은 봄날, 반쯤 열린 꽃들 속에서 스며 나오는 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저런 빛깔의 목련도 있었나. 의아해하며 떨어진 붉은 꽃잎을 하나 주워 코끝에 대어 본 적이 있었다.
두 달간의 만행에서 돌아오던 저녁, 산문을 들어서던 그는 다시 그 나무를 보았다. 그가 보지 못한 사이 꽃은 피었다가 시들었다. 떨어진 자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푸른 잎사귀들이 소리 없이 흔들리는 동안, 그는 묵묵히 그 아래 서 있었다.
한강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쓴 『붉은 꽃 이야기』를 읽게 된 건 우연이었다. 글 중에 나타나는 시성(詩性) 혹은 글의 ‘시(詩)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만난 단어가 ‘시설’이었다. 시적인 이야기라는 뜻이란다. <열림원>에서 내는 시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 이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산문집에 수록된 '븕은 꽃 이야기'에 관한 글
이 책을 불교 이야기, 인연 이야기, 이 책의 서평을 쓴 시인 박형준이 말하는바, “불교적 색채가 강하지만 불교라는 종교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삶이란 매 순간 상처와 각성의 되풀이 때문에 성숙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음을 알게 해 주는 이야기 등 그 어느 쪽이라 해도 좋다. 이 책을 읽는 나의 눈은 레시 포에티크(Recit Poetique)이란 무엇인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시설 그러니까 레시 포에티크란 이런 글을 말하는구나 하고 짐작했다. 시처럼 압축된 간결함과 언어의 밀도, 거기에다 산문의 구조적 완결성이 결합한 새로운 글쓰기라는 시설, 일상적 현실의 무게를 직관과 상상력을 통하여 아름답게 포용해 내는 장르로서 프랑스 문학의 '레시 포에티크'를 우리말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라는 시설에 대해 조금은 눈뜨게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산문집
‘시설’이라는 눈에서 볼 때 이 책이 이러한지 저러한지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다. 다만 ‘시설’이라는 단서가 붙어 나온 점에서는 감동이 줄어들었다는 점은 말하고 싶다. 읽고 나서 '그러네'하는 것 하고 이건 '그런 거'라는 걸 미리 전제하고 읽는 건 다른 문제다.
불교적 용어들은 비교적 나를 편하게 해 준다. 하지만 절 구경 다닌 지가 제법 되는데도 절 그림은 선뜻 와닿지 않음을 이 책의 절 그림에서 또 한 번 느꼈다.
남매 이야기는 대개 감동적이다. 인연 이야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붉은 꽃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었지만 내내 붉은 등을 말하고 있었다. 정작 붉은 꽃은 맨 마지막에 한 번 나온다. 그건 산문(山門)을 드나들 때 그가 본 자목련이었다.
부산 장전동 수녀원 아주 오래전 봄의 자목련, 자목련이 품고 있는 꽃잎 하나. 난 이 영상이 한강의 '붉은 꽃 이야기' 속의 붉은 꽃과 흰꽃에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자목련 철에 내가 절에 가지 않은 건가. 갔어도 다른 것 보느라 자목련을 놓친 건가. 봤어도 유의하지 않은 건가. 자목련은 내게 부산 장전동의 수녀원을 먼저 연상시킨다. 수녀원의 자목련은 내게 꽃잎 하나를 슬픔처럼 품고 있는 자목련이었다.
그런데 선이의 자목련은 무엇을 무엇처럼 품고 있는 자목련일까? 생각이 안 난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지 않는다. 선이는 붉은 꽃, 윤이는 하얀 꽃…. 수녀원의 그 자목련은 붉은 꽃 속의 하얀 꽃이었다.
죽음과 삶, 이건 붉은 꽃 흰 꽃에서 또다시 읽어낸 생의 화두다. 잊고 있다가 문득 상기해 내는.
아주 오래전에 읽은 한강의 '붉은 꽃 이야기', 이제 보니, 지금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보니, 그 책은 이 책을 미리 가리킨 책이었다. 레시 포에티크의 틀을 넘어서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