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남해 창선도의 남파랑길 37코스, 한국의 토스카나라고 불린다는 고사리밭의 어느 지점 길 한가운데이다. 겨울인데도 고사리 밭이 늦여름, 초봄인 듯 파랗다. 길 아래 저기, 버려진 생활용품 몇 개 중에 찌그러진 냄비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찌그러진 냄비, 그건 평범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물이 가지는 인간적, 감성적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개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그러진 냄비는 겉으로는 기능을 잃었거나 쓸모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경험과 역사가 담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되다가 버려진 저 사물들, 저것들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삶과 유사한 점이 있으며 결함이 있더라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게 주려고 몸짓하는 듯 한 자세다.
냄비가 찌그러지는 과정은 마치 인간이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과정을 상징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물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끈기와 적응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찌그러진 냄비는 완벽함이 아닌, 그 안에 깃든 고유의 이야기와 가치를 드러낸다.
보름 여 만에 다시 들어간 남해 창선도, 이번엔 넓어도 그리 넓을 수 없는 고사리 밭에서 시간을 보내다 길뫼재로 돌아왔다. 여기가 한국의 토스카나라고 한다는 게 공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