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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겁 잔치

잔디 실어 오다가 110422

by 로댄힐

진주에서 2번 국도를 따라 하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완사장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국도변에 ‘완사 잔디’가 나오는데, 올해도 잔디를 그곳에서 샀다. 시루떡처럼 반듯하게 잘라 묶어둔 잔디 다섯 장이 한 묶음인데, 60묶음을 실으니 트렁크가 꽉 찼다. 2년 전엔 6만 원이었는데 이번엔 만 원이 올라 7만 원. 그래도 잔디 사장 젊은이는 여전히 친절했고, 여전히 호남이자 미남이었다.


문제는 싣고 오는 동안이었다. 차가 뒤로 기울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또 천천히 운전했다. “40묶음만 실을 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출발한 뒤였다.

하필 그 와중에 길까지 잘못 들었다. 너무 잘 아는 길이라 내비게이션이 굳이 필요 없었는데, 괜히 켜놓은 내비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고지대 마을 길을 두 번이나 지나게 됐다.


그래도 결국은 무사히 도착. 트렁크를 열어 잔디 묶음을 꺼내는데, 차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식겁 잔치 한번 잘했다.


풀어보니 정확히 300장이다. 한 장도 더 실릴 자리가 없었으니 덤을 줄래도 줄 수 없었을 양이다. 필요한 만큼만 싣고 온 셈이다.


2년 전엔 잔디를 4 등분해서 심느라 고생했다. 동네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작두까지 사서 토막을 내며 진땀을 뺐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래서 이번엔 괭이로 2 등분만하기로 했다. 지난번에 산, 결코 싸지 않았던 작두는 창고에서 여전히 새것처럼 잠자고 있다. 또한 지난번에 더위 속에서 끙끙거리며 심은 악몽이 있어, 이번엔 부지런히 서둘러 일찍 심었다.


그러다 보니 2 등분도 채 하지 못한 채 그냥 통째로 심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난겨울 미리 흙을 채워두어 구덩이를 파는 것도 쉬웠다. 큰 수고 없이 300장을 모두 둘러 심었다. 빙 둘러 심고도 충분한 양이었다. 조금 모자란 곳은 나중에 잔디가 퍼지면 채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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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이와 호비 집 앞에도 잔디를 깔게 되어 더욱 기분이 좋다. 잔디가 풀을 눌러줄 테니 그 또한 기대되는 일이다. 지난 5년, 풀과의 전쟁은 전쟁 아닌 전쟁이었다. 이제는 그만 싸워도 되지 않겠나 싶다. 연못 둘레까지 다 심었으니, 앞으로 걸을 길은 온통 잔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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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강추위에 얼어 죽은 차나무 가지들은 붉게 말라 있다. 악양의 차밭이 다 이런 몰골이다. 잘라내야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봄바람과 어울리지 않는 죽은 잎들, 곡우가 지났는데도 새순 하나 돋지 못한 처지가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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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심은 잔디를 둘러보려 일찍 나왔다. 바람이 부는데도 잎이 흔들리지 않는다. 막 돋는 어린순들이라서다. 하지만 유심히 보니 어느 정도는 흔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그들의 살갗을 간질인 모양이다.


그러려니, 앞의 자작나무 세 그루도 다 잎을 피웠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한 그루만 연둣빛을 띠고, 두 그루는 여전히 나무색 그대로였다. 가운데 나무는 살아 있는 듯했지만 가장 큰 나무는 이미 죽어 있었다.


반대편 자작나무들은 조건이 더 나쁜데도 모두 잎을 피웠다. 한 그루는 다소 늦었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은 나무는 잘라냈다. 옆의 나무는 겨우 새순이 돋아나려는 참이라 힘겨워 보여 중간을 잘라내 주었다.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올겨울 동해(凍害)가 유난히 심했다. 차나무는 물론이고, 가중나무 네댓 그루, 돌배나무 한 그루, 제법 자란 라일락 한 그루, 꽃댕강 한 그루까지 죽은 나무가 적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추운 지역 나무라는데 왜 겨울을 넘기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가장 튼튼히 자란 나무였는데. 그래도 혹시 잘라낸 밑동 아래 뿌리에서 새 가지나 순이 돋아나지 않을까, 작은 희망은 품고 있다.

봄바람은 제법 강했지만 포근했다.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임이 분명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괭이질을 하는데, 정작 봄바람에도 반응하지 못한 나무들의 모습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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