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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22

by 로댄힐

그리스 신화에서 돌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 1권과 『아폴로도로스 신화집(Bibliotheca)』 1권은 대홍수 이후의 세계를 이렇게 전한다.


인간의 타락에 분노한 제우스는 거대한 홍수로 세상을 씻어냈고,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되던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 만을 남겨 새로운 인류의 씨앗이 되도록 했다. 모든 것이 물에 잠긴 세상에서 그들은 델포이의 신탁을 찾았고, 신탁은 “너희 어머니의 뼈를 뒤로 던지라”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만물을 낳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였고, ‘뼈’는 가이아의 몸에 박혀 있는 돌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부부는 머리 뒤로 돌을 던졌고,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은 남자가, 피라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되어 새로운 인류가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신화 속 인간은 돌처럼 단단한 심장을 갖고, 육신 또한 돌의 질감을 어느 정도 품게 되었으며, 고난과 근심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칠 기미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삽과 괭이를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밭 한가운데에 작은 밭 세 개를 냈다. 하나는 무를, 두 개는 배추를 심기 위한 자그마한 구획. 빗속에 흙을 일구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비가 많이 오면 흙이 한데 들러붙어 삽날에 찰떡처럼 달라붙는다. 다행히 이곳은 배수가 좋아 흙은 어느 정도 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씨앗 값이 비싸니 함부로 뿌릴 수 없다. 겨자씨보다는 크지만 그래도 작은 씨앗 두 알을 하나로 여기며 아껴 심는다. 씨앗 하나하나가 흙과 물, 햇빛의 기회를 받아야 하니, 손끝이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진다.


그런데 진짜 강적은 빗줄기가 아니라 흙 속의 돌이었다. 수년 동안 밭을 일굴 때마다 캐낸 것이 돌이어서, 이번에는 덜 나오지 않겠는가 하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삽날에 부딪히는 첫 ‘딱’ 소리와 함께 깨졌다. 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나의 노동을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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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구획 중 한 곳은 의외로 돌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두 곳에서는 크고 작은 돌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삽날을 올릴 때마다 돌의 묵직한 감각이 손목으로 전해졌다.


비는 점점 굵어졌고, 이 비를 계속 맞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에도 지난해 파종 적기를 놓쳤던 아쉬움이 떠올라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돌을 모아 옮기는 일까지 빗속에서 계속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캐낸 돌을 그대로 빗속에 두어둔 채 삽과 괭이를 씻었다.


돌. 대홍수 후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냈다는 그 돌. 인간의 심장을 단단히 하고 삶의 무게를 견디게 했다던 그 돌. 나는 비 맞아 반짝이는 돌들을 밭 한편에 버려두고도, 그 돌을 쉽게 ‘버렸다’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산기슭에서 살아오며 나는 돌이 흔하지만, 결코 허투루 쓰이지 않는 사물임을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담을 쌓고, 흙을 잡아주고, 때로는 물길을 틀어주는 돌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자연의 이치를, 나는 땅을 파고 돌을 건져내며 뒤늦게 배우고 있다.


다음에 날이 개면, 그 돌들을 한데 모아 쓸 자리를 찾아줄 생각이다. 신화 속에서 돌은 인간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에게 돌은 이곳의 삶을 조금씩 단단하게 다져주는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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