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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하늘

새 폰과 탭 110904

by 로댄힐

언제쯤이면 하루 남짓, 혹은 반나절이라도 섬진강 흐르는 앞 풍경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소리를 듣고, 몸과 마음을 늘어뜨려 쉬어갈 수 있을까. 걷다가 나뭇가지를 만지고, 허리를 숙여 들꽃을 살피고, 다시 펴서는 형제봉과 신선대, 구재봉과 칠선봉에 걸린 구름을 좌우로 천천히 훑어보는 그런 여유는 언제쯤일까.


개강 준비가 몇 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치과에 다녀온 긴장감, 그리고 당일치기 운전의 피로감을 핑계 삼아 이번엔 정말 느긋하게 쉬어보자고, 편과 나는 차 안에서 굳게 약속했다. 편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나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합의는 차의 문이 열리고 내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자란 잔디를 보고는 예취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가을 한낮의 땀도 장난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고추잠자리 떼 사이로 스치는 기운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지만, 바람이 멈추면 금세 햇살이 따갑게 박힌다.


화단 가장자리의 벌개미취는 너무 커져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다른 화초들을 눌렀지만, 옆의 들깨만큼은 누르지 못했다. 들깨, 팥, 고구마, 잔디는 방향도 크기도 다르지만, 서로를 부추기듯 잘 자랐다. 벌개미취는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단은 내년 봄, 입구 쪽으로 옮길 예정이다.


벼르던 스마트폰을 이번에야 마련했다. 8월 끝자락, 둘째 내외가 바쁜 일정 속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 내려온 김에 둘째가 직접 골라 사준 것이다.


핸드폰은 크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되었다. 화면이 조금 큰 기종을 쓰던 때가 있었지만, 밭에서 일할 때에는 그 크기가 불편했다. 서너 번 떨어뜨린 끝에 결국 망가져 다시 작은 기종으로 바꾸어 몇 해를 무난하게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큰 스마트폰으로 바꾸게 되었다. 기종과 통신사를 오래 비교한 끝에 ‘갤 SⅡ’로 결정했다. 둘째가 산기슭 생활의 특성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조합이라고 판단해 준 덕이다.


스마트폰은 이전의 손전화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화면 속에서 새로운 기능과 정보가 끝없이 열렸다. 사용법도 훨씬 편했다. 다만 크기 때문에 휴대의 불편함은 분명했다. 그래도 카메라 기능은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이 사준 디카도 성능은 좋았지만, 밭일 중엔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스마트폰은 늘 손에 쥐고 있으니 사진 찍을 기회가 많았다. 구도는 정교하지 않아도, 찍고 보니 박꽃은 박꽃답게 담겨 있었다.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해져 가던 때, 뜻밖의 선물이 또 찾아왔다. 태블릿 ‘갤탭 10.1’이었다. 대학 당국에서 교무위원들에게 한 대씩 제공한 것이다. 이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스마트폰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지만, 돌이켜보면 전화기는 이미 오래되어 교체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갤탭을 열어보니 사용법은 스마트폰과 거의 같았다. 통화 기능만 없을 뿐 따로 배울 것은 없었다. 새 기기 둘이 연달아 손에 들어오니, 왼손 오른손이 번갈아 바쁘게 움직였다.


예취기를 내려놓고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다 보니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은 새하얗고, 하늘은 깊고도 선명했다. 7·8월의 하늘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은 계절이 가을임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9월이 온 줄도 몰랐던 나에게 가을이 먼저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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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 비록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하늘은 오히려 나를 그렇게 바라보라는 듯, 한껏 열려 있었다. 새 스마트폰을 들어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찍었다.


범이·호비 집 지붕 아래 박꽃도 카메라에 담았다. 밭일 5년 만에 처음 심어본 박이 살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준 덕에 나는 작은 성공을 맛보았다. “그 자리는 박 심을 자리가 아니다”라며 망설이던 편도 달덩이 같은 박을 따며 결국 웃었다. 박나물로 차린 식탁에서는 더욱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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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호박도 박 옆에 나란히 심어 범이·호비 집 지붕에 함께 올려보자고 했다. 그렇게 하자고 답했다.


밋밋하던 지붕이 이야기를 품기 시작했다. 박꽃은 밤에 피는 꽃, 야화. 그 야화가 지붕 위에서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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