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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갈다, 낫도 갈고

삼각 사다리도 들이고 111011

by 로댄힐

칼을 갈았다. 그것도 여러 자루.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게 칼을 갈았던 날로 기록될 만하다. 가사(家事) 앞에서 고개를 들기 어려운 건 늘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엔 정말 각오가 남달랐다.


칼을 다 간 뒤, 점검을 받았다. 결과는…, 아쉽게도 불합격. “칼이 엄청 잘 들진 않지만,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구먼”이라는 심사평. 다음엔 꼭 합격점을 받겠노라, 칼날에 내 의지까지 세우겠노라 다짐했다.

“다음엔 더 열심히 갈아, 날을 세워, 잘 들게 해서는 합격점을 받아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칼, 더 자주 또 열심히 갈아야지. 갈아 날을 세워야지!”


그래, 칼이여. 자주, 그리고 열심히 갈아주마! 날카로움으로 보답하거라!


낫도 갈았다. 가는 김에 이어진 작업이다. 농기구를 처마 밑에 보관하기 때문에 녹이 잘 슨다. 괭이나 삽, 호미는 매번 사용하니까 녹이 슬 세가 없는데, 도끼나 곡괭이, 쇠스랑 등은 사용 빈도가 낮아 녹이 짙게 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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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낫은 예취기를 산 이후로 덜 쓰는 편인지라 녹이 슨다. 왼손잡이용 내 낫은 덜하지만, 편의 낫은 아주 짙게 슨다. 이번에 그 녹을 다 베껴내다시피 갈았다.


근데 말이다. 마음먹고 앉아서 쓱쓱 갈아보니, 이게 은근 재미가 있다. 거의 취미 수준이다. 여기 와서는 이런 게 놀이가 되는 법이다. “오늘은 칼 연마 데이! 내일은 낫 연마 데이!” 뭐 이런 느낌이다.



이쯤 되니 작업 욕심이 슬슬 올라와, 결국 삼각 사다리도 샀다. 그동안 밭에서 쓰던 일반 사다리는 바닥이 울퉁불퉁한 곳에서는 덜그럭거리고 흔들려서, 가지치기나 과일 수확할 때마다 심장이 쫄깃했다.


겨울 가지치기 철을 대비해 큰맘 먹고 제일 큰 삼각 사다리를 들였다. 가격은 95,000원.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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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서 보는 순간, “아! 이래서 삼각 사다리를 쓰는구나!” 싶었다. 안정감이 완전히 다르다. 흔들리지 않으니, 다리에 긴장이 덜 가해지고 어깨에 힘이 덜 들어가니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풍성한 열매뿐. 올가을엔 이 사다리를 불티나게 옮겨 다니며 매실, 감, 사과, 배, 복숭아, 살구, 자두, 앵두까지—비록 한두 그루씩밖에 없어도—수확하느라 바빠졌으면 좋겠다.


칼도 갈고, 낫도 갈고, 사다리까지 들여왔으니…, 이제 자연의 섭리, 밭의 응답만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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