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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큰 밭이 온통 흰 물결로 출렁였다. 멀리서 보니 메밀꽃인 줄 알았다. 메밀꽃이 필 계절도 아닌데? 내려가 보니 역시 아니었다. 들국화, 아마도 구절초였다.
엄청 넓은 밭을 가득 덮은 구절초의 은빛 물결은 가까이에서 봐도 장관이었다. 밭주인이 일부러 심어 가꾼 듯 꽃이 군데군데가 아니라 고루 펼쳐져 있었다. 지금껏 본 구절초 군락 중 가장 크고, 가장 압도적이었다.
길뫼재로 올라와서 다시 내려다보니, 바람에 일렁이는 흰 물결이 파도처럼 부서졌다. 밀려오는 은빛 파도 앞에 내가 서 있는 듯이 착각도 했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들깨도 모두 베어냈다. 베고 나니 시야가 확 트였다. 악양 들판은 여전히 황금빛인데, 다음 주말에 내려올 때쯤이면 대부분 거둬졌으리라고 예상했었다.
다음 주말, 도착해 보니 하지만 악양 들판은 아직 그대로였다. 콤바인을 부릴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다. 들판은 여전히 가득 찬 채로 바람을 받고 있었다.
빈 밭 위로 바람이 더 세게 불어왔다. 가릴 것이 없으니 바람은 직선으로 달려왔다. 텅 비워진 밭을 바라보고 있으니, 괜스레 삶의 어떤 빈자리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비움은 허무가 아니라 다시 채우기 위한 여백이라는 말, 케노시스(kenosis), 이곳에서 더 실감 난다.
그 빈자리 중 하나를 채우듯, 오늘은 매실나무도 심었다. 무려 16그루. 심으면서도 고개가 갸우뚱했다. “왜 16 그루지? 나는 분명 8그루를 주문했는데….” 착오일까, 덤일까, 아니면 내가 주문을 잘못했을까?
편은 내 주문 착오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나는 단호히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지만…. 부산 집에 돌아가면 이것부터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
여하튼 8그루씩 아래와 위로 나누어 심었다. 품종은 ‘슈퍼 왕매실 개량풍우’. 알이 가장 큰 품종이라니 심는 내내 괜히 흐뭇했다.
그리고 오늘, 길 번지 주소 판을 받았다. 동매길 65-1. 숫자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이제야 ‘공식적으로 받은 길뫼재의 숫자’라고 생각하니, 그 의미가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들며 한층 더 깊게 자리 잡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이 도로명 주소 덕분에 마침내 정식 건축허가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길뫼재를 다시 세울 구상’이 이제 추상이 아니라 구체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셈이다.
길뫼재는 내게 단순한 집 이상의 의미가 있다. 5년여 부산에서 먼 길 다니면서 공을 들인 곳, 그래서 기억과 땀이 농축된 곳,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담아낼 공간이 아닌가. 그런 자리에 “다시 세운다”라는 결심을 하는 데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도로명 주소판을 손에 쥔 순간, 그 용기는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마음속 그림이 아니라, 행정과 땅과 시간 위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계획이 된 것이다.
허가를 향한 이 첫걸음은 소박하지만 묵직하다. 집 한 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그리는 일이고,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열릴 사계절과 일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길뫼재 신축 구상’은 단순히 집을 새로 짓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마음속에 오래 간직해 온 바람과 기억을 다시 현실로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첫걸음의 문턱에서, 구절초 하얀 물결과 황금 들판, 그리고 심어둔 16그루의 매실나무를 바라보며 작은 기대를 품는다.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길뫼재를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