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사를 다녀온 후 사위어가는 해를 앞두고 111217
가보려고 마음만 먹고 아직 가지지 못한 곳들이 있다. 칠불사가 그중 하나였다. 사실 멀지도 않다. 화개 쌍계사 위쪽에 있으니 악양 내 처소에서 금세 갈 수 있는 거리다.
멀면 멀어서 못 가고, 가까우면 가깝다는 이유로 더 미루게 된다. “조만간 가겠지” 하는 핑계는 언제든 쉽게 만들어진다.
이른 아침 산길을 올랐다. 해발 800미터까지 닿는 동안 햇살은 아직 골짜기 아래까지 내려오지 않아, 길은 내내 산그림자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혹시 얼어붙었나 걱정했지만, 고맙게도 빙판도, 주행 차량도 없었다. 아침 산길 특유의 고요만이 길을 채우고 있었다.
칠불사는 겉보기에는 비어 있는 듯했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대웅전 앞쪽에 놓인 신발 두 켤레가 절 안에 이미 하루를 열고 있는 이들이 있음을 말해주었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당기니,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이 간격을 두고 앉아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절은 사람으로 붐비지 않아도, 마음의 숨들이 먼저 와 있었다.
공양간에서도 아침밥을 짓는 몇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절은 늘 그렇듯 조용한 가운데 살아 있었다.
절 마당에 서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참 깊었다. 곳곳에서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오늘의 구름은 유독 가마솥에서 밥을 지을 때 피어나는 뜨거운 김처럼 위로 부풀며 흩어졌다. 속으로 이름을 붙였다. ‘구름밥’. 산의 작은 생명들에게 반야봉이 대접하는 아침 공양 같았다.
내가 이쪽을 돌면 편은 저쪽을 살폈다. 같은 풍경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받아들이는 시간이 흘렀다.
돌아오는 산길에서 생각해 보았다. 바깥세상에서는 분주함과 속도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산중에서는 무엇이 얼마나 빠른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느냐가 더 본질이라는 것을.
허공 위에 피어오르던 ‘구름밥’ 같은 장면은 금세 사라지지만, 그 짧은 순간이 마음에 오래 남을 때가 있다. 시간은 늘 흐르지만, 어떤 풍경은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멈춘 자리에서 지나온 계절들이 흘러나온다.
새벽 기온은 영하 10도 언저리였을 것이다. 지난주에 보니 처마 밑 황토벽에 걸어둔 온도계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바람이 그리했을 것이다. 정확한 온도는 모르지만, 이곳은 발표되는 기온보다 늘 조금 더 차갑다. 해가 뜨기 직전의 냉기는 뼛속을 살짝 움츠리게 만드는 고요한 칼날 같다.
그래서 결국 화덕에 불을 붙였다. 요즘 매실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데, 어제 잘라둔 가지들에 불을 붙였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자연스레 화덕 앞으로 간다. 불 앞에 서면 추위도 물러나지만, 마음도 이상하게 차분해진다. 불빛 하나가 계절을 지탱하는 듯한 기분.
색소폰을 꺼내 반주기 겨울 노래들을 줄줄이 불렀다. 숨결과 소리가 매서운 공기를 살짝 데웠다.
그리고 문득,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성큼 다가왔다. 마치 긴 터널을 지나 마지막 불빛을 바라본 느낌. 2011년의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 화덕의 불처럼 작지만 또렷한 온기가 남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무엇을 이뤘는지보다 무엇을 견뎌냈는지가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산길처럼 굽이진 시간 속에서, 그래도 한 걸음씩은 나아가 왔다는 사실이 은근히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던 ‘구름밥’ 같은 풍경도, 이른 시간의 고요한 절 마당도, 그리고 화덕 앞에서의 작은 노래들도 — 모두 올해를 정리해 주는 한 장면처럼 남는다. 큰 성취가 없더라도, 이런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의 불씨가 되어 내년을 또 기대하게 한다.
해가 바뀐다고 삶이 갑자기 새로워지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한 해의 끝에서 고요한 숨을 고르는 순간이야말로 나를 다시 세우는 시간인지 모른다. 작은 온기들이 쌓여 또 하나의 해를 데워줄 것이다. 다음 계절이 오기까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내는 마음이 나를 다시 한번 앞으로 이끌 것이다.
원두막 아래 주홍빛 덩이들이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햇살을 듬뿍 머금은 빛깔이라 그런지, 마치 스스로 밝아지는 듯했다. 그 옆으로 길게 늘어선 무말랭이 줄들도 겨울의 찬 기운을 묵묵히 견디며 제 몫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겨울 햇빛은 그 무엇도 서두르지 않는다. 곶감도, 말린 무도, 그 앞에 잠시 멈춰 선 마음까지도 조용히 데우며 계절의 끝자락을 넘어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