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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기동 일인가구 Sep 01. 2018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싸움은 끝이 없고

 아직 많이 어리던 십 대 후반 시절엔 나중에 내가 저명한 혁명가들처럼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꿈을 꾸고는 했다. 끝없이 행동하고, 지치지도 않고 싸우던 그들은 겉멋 잔뜩 든 십 대였던 내 눈에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그땐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학교 도서관에서 공산당선언을 빌려 읽었다. 지금은 20세기 혁명가들이 그랬듯 착취의 구조를 밑바닥부터 통째로 뒤집어엎어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세상은 아닐 테지만,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너진 담벼락과 걷어차인 좌판을 가진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그땐 참 분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삶보단 책으로 세상을 배웠고, 제도권이라는 온실 안 화초로 자라 평화롭기만 하던 내 세상이 실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걸 절실히 자각하던 시기였다.  



시간은 흘러 어린 날의 생각은 그것이 가졌던 막연함의 가벼운 무게만큼 쉽게 흩어졌다. 다만, 혁명과 정당한 변화에 대한 생각의 씨앗은 여전히 유효하여 각종 현안들에 대한 보통 이상의 관심과,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서명, 투표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실행했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 싸우는 누군가를 보면 마음 한쪽에 열이 올랐으나 단지 그뿐. 그 이상의 무엇이 없던 난 평범한 학생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십 대 초반 다양하게 읽고 또 배우는 중에, 여러 사람들이 내게 끼치는 영향들을 쉽게 체화하던 그 시절에 머릿속 한구석엔 혁명 너머에 대한 의문이 자리했다. 그들이 부르짖는 혁명의 완성 이후엔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난 어리거나 젊어 돈과 권력, 명예 같은 것은 가져보지 못했다. 잃을 것은 없다시피 한데 얻어내야 할 것들은 저 밖에 많다. 그 때문에, 세상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곳이어야만 했고, 분배란 명목으로 받아내야 할 것들이 많기만 하던 나는, 나와 같이 어리거나 젊은 그들은 막연히 혁명을 바라거나 그것을 맹목적으로 쫓던 것은 아닐까. 의심은 꼬리를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부조리하다 믿는 세상을 고쳐내고, 목청껏 부르짖던 것들을 쟁취해내고 나면, 이후 등장할 새 혁명의 아이들에게 예전에 끌어내려진 그들과는 다른 태도로, 싸워 얻어낸 것들을 쉽게 나누어 줄 수 있을까. 항상 그러지 못했으니 혁명은 끊이질 않았을 테다. 젊던 혁명의 주체들은 그것의 완성 혹은 미완과 함께 나이를 먹고, 새 세대에게 다시금 혁명의 대상이 된다. 내가 젊은 세대로서 지금의 시대에 옳다고 믿는 혁명의 가치는 얼마간이나 유효할까. 한 세대조차 전부 감싸지 못한 짧은 시간 만에 내가 지지하던 지금의 혁명의 기치가 다른 구호에게 쉽게 밀려나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송경동 시인은 혁명 이후에 대한 어쩌면 이상적일 고민보단 당장 지금의 싸움에 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술자리 탁상공론만 해대는 강남좌파들, 세상을 책으로만 배우는 선생과 학생들에게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을, 현장의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혁명이라는 거창한 말보다도 세상의 그늘에 덮인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실제로 행동하고 끝없이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콜트, 콜택 기타 공장 해고노동자 집회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 현장에서, 세월호 참사 집회 현장에서 그는 뜬구름 잡는 얘기할 시간도 없다는 듯 바쁘게 자신의 목소리와 몸으로 싸우고, 그만큼 치열하게 기록한다.  



「너희들은 아직도/ 무엇이 우리를 단결케 하는지/ 투쟁하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전사/ 이윤밖에 모르는 너희의 부패한 머리에/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심는 희망의 전령들/ 거짓 민주주의의 역사를/ 거리에서 새로 쓰는 역사의 새 페이지들/ 닿아진 사랑과 연대의 다른 이름」 '너희는 고립되었다' 중 



거리의 목소리와 격한 투쟁이 전부 글감이 되는 그의 시는 건조하고 직설적이다. 은유와 상징을 줄인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장들 사이에는 아직 젊은 저항의 정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그의 시에는 일부 수준 미달의 노동시나 선전문학처럼 방법론은 잊고 목적만 남은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탁월성이 있다. 이는 시인 스스로 소년원, 고졸, 노동자 출신인 자신의 삶의 행적들을 시를 통해서, 그 작품을 영유할 노동자와 독자들을 향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노동자 집단의 연대를 공허한 구호가 아닌 정서적 교감과 공감으로 이끌어내려 하고, 그것을 실제로 이뤄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닳고 닳은 외침이나 읽기 힘들 정도로 글의 목적만 남은 문장들의 조합보단 훨씬 인상적인 방법이다.  



「이제 나 다시 착취 받지 않으리니/ 이제 나 다시 차별받지 않으리니/ 포스코의 종이 아닌, 제관공 하씨가 아닌/ 새로운 세계를 주조하는 화염 용광로가 되리니/ 착취 받는 용접불꽃이 아닌/ 저 하늘의 영롱한 별빛이 되리니」 '안녕' 중 



「어떤 그럴듯한 표현으로 그려줄까/ 13년 동안 밀가루값 가스값 빼면/ 100원 벌었고 200원 벌었고 300원 벌었고를 헤아리며 변함없이 붕어빵만 구웠을 당신의 무미건조한 삶을/ 당신 옆에서 또 그렇게 순대를 썰고 떡볶이를 팔던/ 당신의 아내를」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중 



시인으로서 그의 탁월함은 수사나 감시를 받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중에서도 발현된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기에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글감으로 승화시키고 시적 구성과 표현을 만들어내는 그의 재치와 능력은 쓴웃음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낸다. 



「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혜화경찰서에서' 중 



「그는 따라다니며/ 단 한번도 내 삶에 간여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만난 이후로 모든 삶을 정리해야 했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보이지 않을수록/ 그는 스쳐지나가는 모든 눈빛 속에 살아 있고/ 다가오는 모든 소리 뒤에 숨어 있다」 '미행자' 중 



표지 안쪽을 보니 송경동 시인은 67년생이다. 올해로 쉰 둘.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여태 그랬듯, 힘닿는 데 까지는 열심히 싸우고, 치열하게 써 주었으면 한다.  



지난 정부는 촛불로 무너졌다. 몇몇 언론은 그 사건을 촛불 혁명이라 칭했다. 단상에 올라 정부를 비판하던 혁명가들과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 혁명이 성공했다며 자축했다. 정말 그런가. 난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오래 궁금해하던 혁명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느냐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엔 이건 확실히 미완의 혁명이고 모자란 저항일 것이다. 다 끝내지 못한 혁명의 변두리엔 아직도 싸워야 할 일들이 많을 테다. 그게 아니라면 벌써 새 혁명의 아이들의 대열에 편입하여 그들과 함께 다음 차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일 지도. 항상 젊은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아직 이전과 같이 투쟁하고, 말과 몸과 글로 싸울 일이 많은 걸 안다. 아직 남은 싸움들은 나 역시 정당하다 믿고, 그동안 겪었을 오랜 싸움들의 치열함과 별개로 그의 차분한 개인적 성찰과 고민엔 위로를 보낸다. 그의 고뇌의 일부를 따라 적으며 글을 맺는다.  



감수를 본 마지막 위원장 김미옥은/ 다른 곳은 손대지 않고/ '전두환'과 '정권' 사이에/ 모두 '파쇼'자를 또박또박 넣어 왔다/ 그해 겨울 구로노동자문학회 총회 때/ 그들이 마지막 조합비라며 20만원이 든 봉투를 내놓았다/ '파쇼'에 맞서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나는/ 글을 써 돈을 받는 것이/ 무슨 죄라도 짓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첫 고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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