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사 출근 첫 날. 내게 주어진 정보는 면접을 진행했던 면접관 이름과 연락처 뿐이었다. ‘27층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다른 사람이 문 열어줄 거에요’ 라는 답장이 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 딱딱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고 내게 ‘안녕하세요’ 한 마디만 건넨 채 자리로 돌아가 일했다.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면접관이었던 사람이 나타났다. 노트북을 챙겨주고, 인수인계를 하겠다며 27층 안쪽 구석 어느 미팅룸으로 나를 데려갔다. S사에 대해서 아느냐, 물었으나 엉뚱한 대답만 하던 내게 화이트보드 가득 필기를 하며 S사의 거대한 세계를 설명했다. 생전 처음 보는 단어를 100개쯤 들었고 당연히 나는 1%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참여한 팀 미팅은 더욱 충격이었다. 한국말을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자리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단어를 알아듣지 못해 필기나 메모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전임자가 적어둔 인수인계 파일을 아무리 읽어도 내가 해야 할 업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력직이었기 때문에 내게 할당된 업무를 당장 처리해야 했다. 내가 구멍이 나면 다음 단계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업무를 단계 단계별로 적어두고,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abc 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함수를 익힐 때 x라는 문자는 그저 그림이다. 내게 주어진 그림을 외워 똑같이 그려내야 했지만, 선을 긋는 방법조차 몰랐다. 사람들은 내게 무관심했고, 나는 초조함으로 마음이 타들어갔다.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뭘 어디서 어떻게 모르는지조차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입사 첫 주 정도를 지내고 바로 나는 야근을 시작했다.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S사 솔루션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용어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나는 어떤 업무도 빠르게 쳐내지 못했다.
회사가 있던 건물은 저녁 8시가 되면 자동으로 소등 되었고, 불을 다시 켜기 위해선 연장 근무 신청서를 작성하여 관리실로 팩스를 보내야했다. 사람들은 폐지 상자에 내가 출력한 연장 근무 신청서가 가장 많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회사 건물 옆 GS25에서 파는 김밥이나 샌드위치가 주 저녁이었고, 이걸 사러 가는 시간마저 아까워 굶는 날도 많았다. 회사 냉장고에는 1.5리터 종이팩에 담긴 주스가 항상 있었다. 주스를 한 컵 가득 따라 원샷하면 배고픔이 어느 정도 가셨다. 하도 매일 야근을 해서, 남자친구가 제발 집에 좀 가라며 회사에 찾아온 날도 있었다. 강남에서 광명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차를 끌고 찾아왔지만 오늘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먼저 보냈다. 남자친구는 위로하며 설득하다가 화를 냈고, 결국 한숨을 쉬며 집으로 출발했다.
밤 10시가 넘어 택시를 타면 집까지 강남순환도로를 거쳐 40분 정도면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는 눈을 감고 있지도 못했다. 새벽에 달리는 택시는 너무 빠르게 달려 무서웠고, 택시 기사가 남자라는 것도 무서웠다. 카카오택시를 부르며 항상 ‘제발 여자 기사님이어라’ 바랐지만 4년 동안의 재직 중 여자 기사님을 만난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기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집에서 나오면 회사엔 7시에 도착한다. 그럼 내겐 2시간이 보장된다. 때론 택시를 타야만 하는 야근보다 지하철에서 졸 수 있는 이른 출근이 나았다.
나는 27층에서 가장 빠르게 오는 사람, 또는 가장 늦게 가는 사람으로 차차 소문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