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막연했고 이유는 간단했다. 규모가 큰 회사, 남들이 들으면 ‘우와’ 할 만한 유명한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리고 외국계여야 했다. 왜? 멋있으니까. 피플앤잡에서 ‘외국계 대기업’ 타이틀만 보이면 바로 헤드헌터 이메일로 이력서를 뿌렸다. 면접조차 보지 못하던 날이 이어지자 눈을 낮춰 계약직까지 발을 넓혀갔다.
6개월 정도 이력서와 이메일 복붙을 거듭하던 어느 날, 헤드헌터에게 급한 채용 건이라는 전화가 왔고 1주일 후 면접을 잡았다. 사실 소속된 조직 이름만 같았을 뿐, 직무 연관성은 제로였다. 단순히 내가 ‘교육 & 마케팅 부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잡힌 면접이었을 거다. 당시 내가 일하던 회사는 어렵게 말해 MLM, 쉽게 말해 다단계 회사였다. 다단계 회사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행사나 교육을 준비하고 마케팅 이벤트를 짜는 팀이었다. 면접 제안을 받은 S사의 ‘Education’ 조직은 S사의 솔루션을 구입한 고객을 대상으로 유상 교육 서비스를 판매하는 팀이었다. 때문에 회사나 직무의 교집합은 0에 수렴했다. 그래도 나는 ‘유명한 외국계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욕심만으로 면접에 응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연차, 반차에 야박했기 때문에 사정사정 해서 면접 시간을 저녁 7시로 잡았다. 9층짜리 건물에서 일하던 나는 27층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순간부터 반했다. 두 명의 면접관을 앞에 두고 1시간 정도를 보냈다. 면접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S사에 대한 정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를 솔직히 왜 합격시켰는지 모르겠다. 아마 간절함 정도가 눈에서 읽히지 않았을까. 두 번째 면접은 APAC 리더와 전화로 진행됐다. 이 시간마저 편안히 할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하철을 놓쳐서 지각한다는 거짓말을 둘러대고, 회사 옆 공원에서 나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벤치를 옮겨다니며 리더와 통화했다. 전화 연결 품질은 최악이었고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상한 대답만 하며 15분 정도를 겨우 버텼다.
S사 역시 사람이 급하긴 했나보다. 말도 안되는 면접을 본 내게 합격 통보를 던졌다. 합격 통보를 들은 후, 미칠듯한 고민에 빠졌다. S사는 당연히 매력적인 조건이었으나 문제는 계약직이라는 점에 있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아무리 불만족스러웠어도 일단은 정규직이었고, S사는 파견 계약직이었다. 정규직 전환에 대한 조건은 당연히 부재했고 파견업체는 애매모호한 대답만 흘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을 것인가, 뱀의 머리가 될 것인가 용의 꼬리가 될 것인가… 베개에 머리만 대도 잠들던 내가 누워서도 눈이 말똥말똥할 정도로 고민을 했다. 이직 키워드를 검색하며 수도 없이 많은 경험과 남의 깊은 고민을 읽었다. 누워있다가 베개를 퍽퍽퍽 치기도 했다. 왜 나를 합격시켜서 이 고민을 시키나. 아닌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다행인 건가… 아, 누가 나의 미래를 미리 알고 결정을 대신 내려주면 좋겠다…
결국 이직을 결정했다. 타이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연봉이 거의 50%나 오르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대리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라고 말을 꺼내던 순간 함께 일하던 대리님의 표정이 떠오른다. 커리어 개발에 있어 불만족스러운 회사였지만 모나지 않게 착실히 일했고, 함께 일하는 동료나 선배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나를 붙잡기 위해 함께 일하던 팀장님, 부장님, 임금 협상을 위한 재무팀장의 면담까지 있었고 퇴사하는 날에는 대표님의 따뜻한 응원을 들으며 심지어 눈물도 흘렸다. 인정 받는 직원, 뱀의 머리였던 나는 용의 꼬리에 올라타 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