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알콜 8개월째
D+233
Jeddah, KSA
20살 이후로 여러 번 금주와 절주를 시도했지만, 말만 시도하는 거지 그것에 진심은 아니었다. 그 즐거운 술을 왜 끊냐는 주의! 그리고 자라 온 환경에서도 부모님과 주변인들에게는 술이 항상 함께 했기에 술이 있는 풍경은 당연했다. (술을 드시지 않는 부모를 둔 사람이라면 이해 안 될 풍경일 것이다.) 그런데 사우디에 오고 나서 20살 이후 처음으로 8개월 동안 강제 무알콜 상태다.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면 그 나라 맥주로 시작하였으나, 여기는 그 흔한 이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없다. (만약 이 나라를 대표하는 맥주가 생긴다면 그 이름은 뭘까?ㅋ Saudia Beer? Oasis of Desert? ㅋ) 술 없이 어떻게 1년을 버티나 걱정하고 왔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술을 안 마셔서 여러 좋은 점도 있다.
정신상태와 몸상태 : 정신이 맑고 명료해짐으로써 그와 함께 '알아차림'이 따라온다. 작은 예로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피부에 작게 뾰루지가 올라오는지,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할 때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지 같은 거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구체적으로 나에게 얼마 동안 머무르고 서서히 안개처럼 사라지는지 같은 거. 이러한 것은 술을 안 마셔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명상을 얇게 접하며 의식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술을 마실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깔끔하고 담백하게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거 같다. 그리고 몸상태는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잘 모르겠지만, 생리할 때 생리통이 거의 없어진 것과 피부도 약간 밝아진 거 같다.
사람들과의 관계 :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과는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없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다.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이고, 그렇게 치면 이 사우디에서는 나와 우정을 나눌 사람이 없단 말인가? (현재까지는 그렇다.) 어릴 때 뇌가 말랑말랑 할 때 만나던 친구들은 그 친구가 술을 마시던 안 마시던 그 시절의 말랑말랑한 추억으로 지금까지 쭈욱 친구이다. 그러나 사회생활과 해외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예전 외노자 시절, 영어가 힘들고 외국인들에게 어색함을 느낄 때 술이 큰 도움이 됐다. 술을 마시면 자신감에 영어도 술술 나오고 어색했던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일할 때도 같이 일하는 파트너와 감정이 격해질 때도 우리는 술로 대동 단결했고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사우디에서는 술을 빼니 모든 인간관계가 맛으로 치자면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심심한'그런 관계이다. 장점은 술 때문에 실수해서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모두와 그저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며 심플하게 지낼 수 있다. 단점은, 또 맛으로 표현하자면 '짜지도 달지도 않은 이 심심한' 건강한 맛이 몸에는 좋으나 정신건강에는... 너무 재미가 없다. ㅋ 분명 우리가 같이 일하고 있는 이 그룹에도 술이 있다면 많은 관계가 달라졌으리라.
시간을 보내는 방식 :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다. 여행을 가면 도착하는 여행지에서 그 나라의 술은 무엇 무엇이 있나 새로운 세상을 훑어보듯 술도 다 섭렵하겠다는 자세로! 일을 할 때는 일이 끝난 뒤 피곤에 지친 나에게 가볍게 알딸딸함을 주는 자유의 혼술, 어색한 사람과의 어색한 공기를 잽싸게 없애기 위해 술, 짜증 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또 술, 아침에 일어나 목마를 땐 맥주 ㅋ (이건 매일매일은 아니고..) 이렇게 내 삶은 술과는(특히 맥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이었다. 술은 취하라고 마시는 거라 생각하고, 한번 취하면 스탑이 힘든 나에게 이불 킥! 의 역사는 셀 수 없이 많고, 숙취로 힘들어하며 보낸 날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내 손에는 맥주병이 쥐어졌는데 강제적으로 이 것이 사라졌다.
그동안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던 그 시간들이 사우디에서는 공중에 붕 뜬다. 할게 너무 없다. ㅠ 그래서 내가 하게 된 것 중의 대표적인 것들이 '독서'와 '생각'이다. 독서는 원래 항상 마음에는 있지만 실천이 잘 되지 않았는데, 요즘은 나름 책을 읽는데 근육이 좀 붙은 거 같아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은 술술 잘 넘어간다.(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건전하다.ㅋ) 그리고 그와 함께 많은 '생각'을 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게, 굳이 생각이라는 건 많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항상 하고 있는 거 아닌가라고. 그런데 이 생각도 시간이 없을 때 스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과 시간이 많아서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는 거는 다른 거 같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사우디에서 도를 닦고 있으며 몸에서 사리가 곧 나올 것이라고…! 사우디에서는 내가 그동안 사는 게 바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와 내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모든 일이 일어남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작게나마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살짝 힌트를 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금주를 하여 여러 좋은 점이 있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맥주를 주문하는 거다!
“Can I have a Beer? ple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