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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faitement imparfaite Jun 02. 2020

그 통통한 바나나빵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유별난 빵 사랑은 꼬꼬마 시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어릴 때는(라떼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던 관계로 외조부모님 댁에 살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의 저녁 풍경은 이렇다.


때는 1994년.

느지막한 오후, 하늘은 반쯤 어둡고 날씨는 푹하며 세류소방서 앞 대로변 가게들엔  하나씩 조명이 켜진다. 할아버지와 손을 꼭 잡은 나는  붉은 '빵' 간판에 따뜻한 주황색 불빛의 빵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초코가 반쯤 묻어있는 위에 알록달록 스프링클이 뿌려진 바나나모양 빵을 하나 산다.


투명 비닐봉지 안에 든 바나나빵은 그 모양과 크기도 진짜 바나나와 흡사했다. 통통한 진짜 바나나모양 +초코 코팅+알록달록 스프링클의 삼위일체는 (그 빵이 맛없다는 걸 이미 알면서도) 왠지 매번 모든 걸 다 갖춘 제일 좋은 빵(?!)이라는 미지를 풍겼으니, 예쁜 것에 눈돌아가는 어린 여자아이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 밖에.


계산한 빵을 달랑달랑 비닐봉지에 넣어 할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와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세상 맛있을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퍽퍽하고 목메는 맛은 겉모습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움을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당하고도 다음날 또 빵집에 가면 이상하게 왠지 오늘은 정말 맛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또 바나나빵을 사게 되는 것이었다. 기대와 실망의 무한 루틴은 매 저녁 반복되곤 했다. (똑같은 행동을 하며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건 미쳤다는 증거라는 말을 알게된건 너무나 나중이었다...)


할아버지 댁에서 내가 아주 살았던 기간은 그리 길지는 않아서, 곧 엄마가 직장을 관두면서 우리 식구는(나를 포함) 따로 이사를 갔다. 그러고도 할아버지댁에 많이 놀러는 갔지만, 굳이 빵집에 갈 일은 없었고, 다른 어떤 빵집에서도 같은 바나나빵을 본적이 없었기에, 딱히 다시 생각나는 맛은 아니었던 바나나빵은 거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다만 오늘 다이어트용 스무디에 넣으려고 사놨던 바나나를 보고있자니 불현듯 생각이 났다.


요샌 정말 맛있는 빵집도 많이 생기고, 새벽 배송 덕분에 전국 각지의 유명한 베이커리 빵도 밤에 결심(?)하면 다음날 아침에 먹을 수 있으며, 이런 비싼 빵들은 대부분 맛있을 거란 기대에도 잘 부응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요새는 왠지, 이렇게 선선한 초여름 오후에, 사는 데 지쳐버린 다 큰 몸을 이끌고, 다시 그 바나나빵을 사러 가고 싶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면서,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주황색 빵집에 들어가, 여러 빵 중에 짐짓 한참 고민하는 척하다가, 어쩔 수 없단 듯 그 바나나빵을 사는 거지. 그 빵을 우물우물 먹으며 'n0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나 맛이 없잖아!'라고 생각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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