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파토내줘서 고마워

by 새벽달

2019년 봄-여름


그해 유독, 주말의 햇빛은 그렇게나 달콤했다.

이틀을 아무것도 안하고 온전히 쉬어도 된다니. 공부도, 아르바이트도 안하면서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니.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뒹굴뒹굴 누워만 있어도 되는 이런 호사스러운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니. 10대 때는 늘 공부라는 과제와 수능이라는 부담이 있었고, 20대에는 당장 생존과 직결된 돈 문제, 취업 문제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는데. 내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사치스러운 안정감이었다.


우리는 당찬 신입사원이었고, 이러쿵저러쿵 회사에선 많은 일이 있었지만, 하루 몇 차례의 담탐(담배타임)에 푸념을 하고 누구 흉내를 내고 배꼽을 잡고 웃고나면 주말은 늘 홀가분했다.


그날은 같이 쇼핑몰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사실 난 우리의 '사외약속'에 대해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던 터였다.


아무리 친해도 회사 밖에서 자꾸 만나서 놀다보면 어느 순간 나든 걔든 불편해지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사실 깊은 마음 속으로는, 얘랑 정말 '친구'가 되어버리고 나는 마음을 줬는데 결국 그냥 '회사사람'이 되어버리고 이런저런 지사 이동, 부서 이동으로 멀어지고 나면 난 또 상처받겠지? 라는 생각.


지금 생각해보면, 이 겁에 질린 고슴도치같은 생각을 난 끝까지 버리지 못해서 그 애에게 걔만큼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 교훈을 얻고 이후에 반면교사로 내가 '회사사람이어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구나, 얘는 조금 그래도 될 것 같아' 해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준 사람들은 하필이면 전부 '회사사람'일 뿐이었다.


인생이, 아니 인생을 탓할 것만은 아니라, 참 모순적인 것이다. 나도 인생도.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은 그 조금의 불안감, 그리고 이 완벽하게 집순이인 나를 위한 주말의 달콤함, 그에서 비롯된 약간의 귀찮음이 약속날 아침부터 꼬깃꼬깃 고개를 내미려할때쯤,


깨톡.


"달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리. 오늘 썸남이 볼 수 있대!!!쇼핑은 다음주에 가자. 으하하 여자들의 우정이란 이런 것 아니겠니"


아, 난 정말 유레카를 외치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래!!!!!!!이게 파토지!!!!파토는 이렇게 내는거야!!!!!!!나에게 말했어!!!!!!썸남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나중에 보고싶다고!!!!!!!


이 솔직함!!! 몸이 좀 안 좋다는 둥~ 해서 어차피 핑계인 걸 아는 내가 앞으로 약속을 먼저 잡자니, 얘가 혹시 날 밖에서 보기 부담스러운 걸까봐 조금 고민되고, 그럼 내가 또 말을 꺼내야 하나, 다음에 얘가 또 약속을 잡으려고 하면 그건 약속 파토에 대한 의무감과 부담감에서일까, 정말 나를 보고싶어서일까, 등등

이런 밀당-어쩌면 사회적 계약(속박)-이 필요없어졌다!!!!!!네 말이 옳다!!!!!참이다!!!나라도 썸남을 볼거야, 그럼 물론이지, 당연하지, 우리는 알잖아!!!!!!!


그리고, 여자들의 우정이 이런 거잖니, 라니!!! 정말이지 사랑스럽지 않은가.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솔직함이 아닌가!!!!


적어도 우리는 서로 솔직했다. 서로의 진정한 우선순위(? -하지만 다들 똑같잖아, 귀한 주말에 회사 동료보다는 썸남을 만나고 싶잖아?)를 진심으로 공감했고, 각자의 썸남 혹은 남친과의 시간을 우선시해주었으며, 서로의 컨디션과 기분상태를 완벽하게 배려했다. 우리의 약속은 서로를 진정 만나고 싶어서 잡는 찐-약속인 동시에 언제나 보류 가능한, 서운하지도 미안하지도 않는, 보류해도 적절한 타이밍 내에 실현되는, 그렇기에 서로 더 믿음이 가는 그런 것이었다.


- '조만간 만나서 밥이나 먹자'

- '어 나 다음주 10, 13, 15 그리고 25, 26 되는데 언제?'

런 류의 약속이나,

- (연실 핸드폰만 쳐다보며) 내가 집에 일이 있어서 오늘 좀 일찍 들어가야하긴 하야하거든..

- (깨똑)오늘 시간이 되긴 하는데, 집안일도 해야되고 조금 생리도 할거같고 해서 좀 애매하긴한데, 너는??(답정너)

우리의 만남은 이런 질 낮은, 얼음장을 걷는 듯한 만남이 아닐 수 있고, 아니었다.

그 파토 이후, 내 평생 이렇게 신뢰가 가는 약속 파트너 또는 친구 또는 연인은 없었다.


음, 그때 약속을 파토내줘서 정말 고맙다. 상에. 약속을 파토당해놓고 그때처럼 내가 속이 뻥 뚫려본 적이 없었잖아. 여자들의 우정이란, 그런 거잖니!!난 우리의 가벼운 물욕보다는 너의 설레는 썸을 진심으로 응원했단다!!


그리고 알아, 너도 그래줘서 고마워, 가장 진심으로 대해줘서, 내 뾰족한 인생에 처음으로 '서로 약속을 파토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줬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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