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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faitement imparfaite Jul 18. 2020

공무원시험이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좀먹는가

동생이 지난 주 9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봤다. 3일이나 지나서야 채점을 하길래 거 쌔~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안 될 각이라고 한다. 채점한 다음날, 카톡을 보내 "뭐해?우울해.."로 시작해서 인생에서 2년을 낭비했네 어쩌네 한탄을 한다. 마한텐 아직 말도 못했단다.


생들이란,  지들 필요할 때만 찾지 싶으면서도 내가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을 때가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나름 명문대라지만 인문계열에 학점은 쓰레기요, 스펙이라곤 개나소나 다있다는 토익점수 정도가 전부였던 나는 내가 지원한 사기업들의 모든 서류전형에서 보기좋게 광탈했다. 내가 학점은 안좋고 돈 버느라 나이는 좀 먹었어도 20대 내내 부모님께 손 한번 안빌리고, 전공과는 상관없는 온갖 종류의 에 '도전(ㅋ)'하며 각각의 일마다 나름의 '성취(ㅋ)'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자소서에 어필해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남들 부모님 돈으로 교환학생 다녀오고, 공모전 참가하고, 이름만 그럴듯한 대외활동으로 스펙 몇줄  채울때  진짜 사회에 뛰어나온거라구요!!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런 답안은 쓸수 있는 칸이 없었다.ㅋㅋ


어쨌든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번 기회에 모실 수 없는 인재'였고(아쉬우면 좀 모셔가봐라!), 스펙과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한다. 처음엔 고시를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강 가격을 검색해보고 깨달았다.


 ! 고시 '응시'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준비' 기회드럽게 불평등하구나^^!


고시는 보통 예비순환 1순환 2순환 3순환 이렇게 진행되는데, 예비순환은 야심차게건너뛴다해도 1과목 1순환 강의 가격만 89만원인가 그랬다. 마지막엔 논술때문에 첨삭을 받아야하니 학원도 거의 필수라고 했다. 나에겐 당장 그런 목돈이 없었고 일단 7급부터 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2년 반동안 7급 시험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은 20대 중반 이후 이미 빵빵한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외국 로스쿨 등으로 유학을 가있었다. 내가 매일 집에만 쳐박혀서 쌩얼로 앞머리 까고 최고로 못생긴 자연인의 모습으로 공부만 하는 동안, 인스타만 보면 친구들은 고급진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맛집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 올렸다. Sns를 믿으면 안돼!라고 정신승리하며 인스타를 탈퇴해봤자 주기적으로 바뀌는 카톡 프로필 사진들만 봐도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하고 화려하게 사는 것 같았다.


친구들을 만나서 애써 밝은 척 해봐도 별로 할 얘기가 없고 괜히 스트레스를 받아 점점 공부를 핑계로 모임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공시 준비를 하는동안 꽤나 많은 친구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싸우다가 홧김에 '넌 친구들 만나서 놀으라 해도 자격지심에 친구들도 안 만나면서 왜 나한테만 난리야!!'라고 했었는데, 그 말에 분개했지만 솔직히 사실이어서 너무 상처받았다.


전공 과목이나 헌법같은 그래도 살짝 까리한 과목을 할 땐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공통과목인 국어 국사 공부를 할때면 내 처지가 너무너무 한심해졌다. 기껏 좋은 대학 졸업해서 28살의 나이에 이제와서 초콜릿인지 초콜렛인지, 주꾸민지 쭈꾸민지,  어느 돌덩이가 진흥왕 때 세운 비석인지  따위의 중학교 때나 할 법한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데 심지어 또 드럽게 외워지지도 않을때면, 진짜 현타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난 그동안 뭘하고 살아서 이제와서 이러고 있는 것인지.  


공무원 시험이 잔인한 건, 그렇게 공부를 해도 올해 잘나온 점수가 내년에도 잘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기약이 없는 싸움이다. 기본적으로 9,7급 공무원 시험은 성실성 테스트라고 봐야한다. 객관식 시험의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운거면 알고 못 외운거면 모르는 거다. 문제는 그 20문제를 맞추기 위해 물리적으로 말도 안되게 많은 양의 교재와 참고자료를 정말 구석구석까지 보고 외워야한다. 공무원 시험 문제가 얼마나 치사하게 지엽적으로 나오는지는 이미 미디어에서 많이 다뤘으니 굳이 지적하지 않겠다..


그냥 존버가 답이었으며, 자존감은 점점 박살나고 멘탈은 바싹마른 드라이플라워처럼 건드리기만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상태였다.


그렇게 몇 년을 단순 암기식 공부에 쏟아붓고나서 떨어지면, 남는 것도 없다. 그냥 그 시간은 버린 시간이고, 인강비며 교재비는 모두 기회비용이다. 공무원 시험 공부 했던 걸 어디다 써먹을 데가 없다. 이미 취업이 어려웠는데 그새 나이까지 먹어버리고 공시 실패 타이틀까지 붙게 생겼으니, 그야말로 갈 데가 없다.


그래서 공시생들이 장수생이 되는 거다.



결국 난 29살에 드디어 공시생 생활에서 탈출했지만, 막상 취업을 하고나니 그 시간들이 참 허무했다. 다시는 안 올 20대 후반을 방 안에서 매일 박살난 자존감으로 우울해하며 시험 결과에 대한 두려움, 또 떨어졌을때의 쪽팔림에 대한 걱정으로 오기로 공부하며 보냈다니. 공무원 시험이 뭐라고...ㅎㅎ


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얻은 거라면, 그래서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미래의 시험 결과를 걱정하느라 우울하게 보낸 시간만큼,  앞으로는  하루하루를 최대한으로 행복하게 보내겠다고. 


막상 취업하고 나니 그렇게 생각처럼 기쁘지도 않더만!


뭐 이것만 되면 행복하겠다 이런 건 생각보다 부질없고, 그냥 순간순간을 구슬 꿰듯 행복하게 감사하게 보내는게 낫겠더라.



동생이 공시를 1년 더 준비할지 말지는 모르겠다. 나도 그 지겨운 공부를 또 1년을 해야한다는 심정이 얼마나 막막한지 알기에, 한번 더 해보라고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요즘 시국에 취업하기는 더 어려우니 쉽게 때려치우라고도 못하겠다.


지인의 지인 커플은 여자분이 10년동안 지방직 공시에 떨어지고 , 남자분은 수도권에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9년을 사귀고 결혼 얘기가 오가다 여자분이 지방직 공시를 포기하지 않아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 10년 동안 했으면 그냥 접지..싶다가도, 사실 몇년만 공시에 매몰되어 있다보면 다른일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지고, 그렇게 도전할 자신감조차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서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 좁은 땅덩이에서 수많은 2,30대가 청춘을 공시에 꼬라박고 있다는 현실이 참 먹먹할 뿐이다. 인생 뭐 별거 있나. 다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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