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울산에서 살게 될 거라고 예언처럼 말하곤 했다. 내 전공인 기계공학을 써먹기에는 '산업수도' 울산이 최적의 도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산에는 친척 하나 없었다. 울산에 처음 온 것은 1980년, 난 7살이었다. 아버지의 개인택시를 받기 위해서였다. 가족 여행 삼아서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 왔었다. 출고문에서 마냥 기다리다가 방어진에서 오징어회를 드셨다는 얘기는 아버지의 단골 '옛이야기'라 마치 내 기억에도 남아 있는 듯하다. 그때 받은 차가 포니였고, 5년 뒤 포니2를 받으러 다시 왔었다.
다음 방문은 수학여행이었다. 부울경 출신들은 울산에 수학여행을 왔었다고 하면 황당해한다. 여기 뭐 볼 게 있냐는 거다. (누구나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당시 서울에서는 경주 아니면 설악산이 당연한 수학여행 코스였다. 경주 수학여행은 석굴암, 불국사뿐 아니라 당시 포항제철과 울산의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이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운이 없게도 나의 중,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모두 경주였다.
대학에 가서도 '현대'의 도시, 울산에 또 견학을 왔으니, 내 전공에 맞는 도시를 울산으로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찌감치 그런 맘이 굳어져, 군대에서 만난 울산 출신 고참에게 울산 인심이 어떤지 미리 물어볼 정도였다.
예정된 듯이, 나는 현대중공업에 취업을 했고, 울산을 향해 집을 떠나는 날이었다. 집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긴 여행을 가는 거 정도로 생각했던 거 같다. 그렇게 어깨에 가방하나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너는 울산 간다더니 진짜 가는구나. 엄만 안 울어
그렇게 낯선 도시로 떠나는 아들에게 엄마는 담담히 말씀하셨다. 현관 앞에 서 계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자식이 다 커서 집을 떠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도 못 했던 나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별말씀을 다 하시네'라고 느꼈던 거 같다.
그렇게 부모님 곁을 떠나서 울산에서 산지 이제 23년이 넘었다. 울산에서 결혼도 했고, 고등학생인 두 딸이 있다. 큰 아이가 벌써 고3이니 집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 과연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아빤 안 울어'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을까? 장담컨대, 그러지 못할 거다. 그런 말은커녕 눈물을 보이고 말 거다. 지금 상상만 해도 이렇게 울컥하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엄마는 독한 면이 있다. 막내아들을 '엄만 안 울어'라며 담담히 떠나보낸 거 보면. 아니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다짐이었을까? 엄마가 울지 않았던 걸 보면 그 다짐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나중에 나도 같은 다짐을 하게 될까? 과연 그 다짐이 나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애들이 자라서 집을 떠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시간은 무심히 흘러서 불현듯 닥치겠지. 연습해 볼 수도 없는 그 순간은 그렇게 당황스럽게 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