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몽골] [랠리] [중고차] [미친사람] 그리고 [버킷리스트]
"내년 여름엔 유럽여행을 가 봐야겠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부분의 순간들이 그러하듯, 이 이야기 역시 막연하고 소소한 몽상에서 시작한다.
나는스물 네 살의 기억들을 마무리하고 스물 다섯을 준비하는 평범한 남자 대학생 이었다.
밟아본 외국 땅이라고는 베트남 한 군데 (그것도 여행이라기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경험)뿐이었던 나에게 '유럽 여행'은 그야말로 '버킷리스트' 였을 뿐이었을지 모르겠다.
'유럽여행' 과 '버킷리스트'는 무척이나 흔한 단어인 것 같다. 블로그라던지, 영화라던지, 이미 진저리가 날 만큼 많이 회자되는....
그렇지만 실제로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현실로 이루어 내는 사람은 주변에서 본 적이 없었다. 다들 '이거 내 버킷리스트에 넣을래' 라던지 '내가 죽기전에 이건 꼭 한번 해본다' 라고 쉽게 말하지만, 버킷리스트 안에 들어간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경우는흔하지 않았다.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는 내가 보기에, 꿈과 이상의 블랙홀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에게 '유럽 여행'이란, 버킷리스트에 들어간 의미없는 몽상 정도였던 것 같다.
별 일이 없다면 이번에도 역시나 시간이 흘러 갈 테고, 꿈과 이상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느닷없이 듣게 된 이야기 하나가 버킷리스트 속으로 빨려들어가던 유럽여행을 낚아채 현실 세계에 내팽개쳤다.
"야 내가 여름에 유럽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몽골랠리라는걸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중고차 한대가지고 유라시아를 건넌다는데 저런 미친사람도 있구나 싶더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몇 가지에 강하게 꽂혔던 것 같다.
[유럽] [몽골] [랠리] [중고차] [미친사람]
크 이건 뭐 인생 로망의 결정판이 아닐까 싶었다.
문화의 중심지인 [유럽],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몽골], 거친남자의 대명사 [랠리], 기계과의 로망 [자동차]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친사람]이 한 번쯤 되어보고 싶었다.
이미 저 한 문장을 듣는 순간 모든 결정은 끝났다.
함께 이 이야기를 듣던 SB이와 나는 이미 유럽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몽골에서 은하수를 이불삼아 중고차 위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실제로 겪어본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우선, 왜 저런 미친짓을 누가, 왜, 어떻게 하는지 부터 알아봐야 했다.
몽골랠리 는 영국의 비영리 기업인 "Adventurist" 에서 개최하는 환경보호 랠리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으니, 영상 한 편을 보며 이야기 해 보자.
영국 치체스터 지방의 Goodwood 서킷에서 출발해,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 마을인 울란 우데까지 여행한다.
우리는 바다를 건너야 했으며, 서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와 독일의 아우토반을 지나 러시아의 광활한 시베리아를 달려야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몽골의 초원을 지나 바이칼 호수 옆의 작은 도시에서 여정을 마치는 것이 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12000Km에 달하는 거리를 중고차 한 대에 의지해 나아가는 것이다.
규칙은 세 가지 말도 안되게 간단한 것들 뿐이다.
1. 누적주행거리 10만 Km 이상, 1.2리터 미만의 "Shit car(똥차)" 혹은, 125cc 미만의 미니바이크를 타고 여행한다.
2. 어디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니들이 알아서" 해결해라.
3. 환경을 보호하자 (환경 기부금을 낸다)
이 세 가지 규칙 외에는 어떤 제한사항도 없으며, 어떤 경로를 어떤 방법으로 거쳐 어떻게 여행을 할 것인가는 모두 당신의 결정에 달려있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에 사용된 단어들 (Shit car, crap같은)을 보고 있자니, '이사람들 진짜 돌아이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이 뛰었다.
내 인생에 저런 미친 사람들과 함께 미친짓을 해볼 기회는 지금뿐일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내 인생에서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집에는 1년간의 휴학을 선언했고, 다음 여름을 꿈속에서 보내기 위한 현실적인 준비를 해 나갔다.
역설적이지만 항상 그렇듯, 저런 미친짓을 실제로 행하고 수습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구글링을 통해, 다른 참가팀의 예산안을(물론 현지인 기준이었지만) 찾아 볼 수 있었다.
팀 별로 편차가 있긴 했지만, 대략 인당 600만원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됐다.
아마 대부분의 유럽여행 계획이 꿈과 희망의 양동이(버킷리스트)에 쳐박히는 이유가 비용이 아닌가 싶다.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대학생에게 600만원은 정말정말정말정말 큰 돈이다. 여행 전까지 남은 기간은 7개월여 가량. 알바를 한다고 해도 거의 매 달 100만원정도를 벌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만들 수 있는 우리에겐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험하고 궂은일에 내 노동력을 파는 것.
다행히, 함께 여행을 계획하던 SB이의 경험과 인맥을 통해 소위 '노가다'판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말 그대로 노가다 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얻어주신 숙소에 숙박하며
매일 5시에 일어나 출근해서 쇳덩이를 날랐다. 반장님들을 따라 이 현장에서 저 현장을 따라다니며 페인트칠을 하고 볼트를 조였다.
매일매일 6시에 퇴근해 숙소에 도착하면 8시즈음이 되었고, 하루종일 먼지먹은 몸을 물로 헹구고 맥주를 한 잔 걸치고나면 눈깜짝할 새 12시가 되었다.
이렇게 매일을 반복하면 하루 받는돈은 10만원가량. 주말작업을 제외하고 여차저차 빠지는 일을 계산하면, 앞으로 3개월 가량을 반복한다 해도 여행자금을 다 충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SB이의 지인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일이 너무 많아 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회사를 옮긴 일상은 지금보다 더 바쁘게 흘러갔고
매일 5시 30분에 기상해 10시즈음은 되어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신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고,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이 4개월가량의 기간동안에도 SB이가 손을 다쳐 여행이 무산될 뻔 하는 등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다 풀어놓기에는 이야기가 지루해 질 것 같으니 (좋은 기억도 아니었고) 다음 기회로 미뤄놓는게 좋을 것 같다.
여차저차 해서 4개월간의 청춘을 팔아 800만원에 달하는 큰 돈을 마련해 낼 수 있었다.
자, 이제 돈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애마 "고고"와 함께하기까지의 우여곡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사진 및 영상 출처
메인 홈페이지 영상 : http://www.theadventurists.com/mongol-rally/ (공식 홈페이지)
여행경로 : http://blog.bullsone.com/1572 (불스원 블로그)
규칙 : http://www.theadventurists.com/mongol-rally-the-rules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