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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빈 Dec 15. 2019

말 한마디로 나를 울릴 수 있는 정치인을 원한다

연예인이 주는 마음의 위로의 울림은 정말 크다. 나도 음악을 들으면서 정말 많이 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야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삶의 고통에 대해 위로를 하고 더 나은길을 보여주겠다는 노래와 같은 언어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힘이 있으니까, 그걸 위해 존재하니까 그래야 마땅한 것 아니냐 그 말이다.


2012년 말, 대선 직후였다. 동기와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러 갔다. 혁명을 꿈꾸던 자들이 사람들의 외면 속에 죽어갔다.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민중의 자유를 노래하던 이들이 죽었다. 고통스러워서 울었다.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 누군가는 국가발전의 주역이라 불렀을지 모르나 개인은 희생되고 국가, 국민전체가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일부세력의 안녕과 결탁으로 움직이던 그 시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간첩으로 몰려 고문받고 소리없이 죽임당하던 그 암흑의 시대의 공범자인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서 너무 슬퍼”라며 대선 결과를 두고 펑펑 울었다. 나만 그렇게 울었겠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아마 그중엔 문재인 대통령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시간들을 보내며 얼마나 자책을 했을까. 내가 그때 되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괜히 소명으로서의 정치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리라.


‘사람이 먼저다’ 분명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문제들에 발언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우선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았지만 결코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말이었다.


대통령 당선인의 슬로건은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그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당시의 국민들은 그 문제에 합의한 것이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 이후 여론화되지 못하던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죽음에 대한 뉴스가 사람들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이제는 중요한 어젠다다. 이제 도전과제는 국가정책이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하거나 포섭하지 못했던 소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발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진정 마이크를 제공하는 일이다. 청와대 청원이 일부 그런 일을 담당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러면 실질적으로는 얼마나 달라졌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빠르지 못하다. 정권 초기 과감히 도입한 정책들은 백래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새로운 기준선을 한 번 옮긴 다음엔 완전히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세발 앞선 뒤 두발 후퇴할지라도 한 발은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 정책을 해야 한다.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시스템을 통해 정착시키면 되돌리기 어려우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그 시스템마저 너무 쉽게 뒤집혔다.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정착되기도 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시스템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거의 10년이 흘렀고 새로 정한 기준은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정책의 뒷배는 국민의 지지여야 한다. 왜 이 방향인가, 방향으로 가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고 있는가에 대한 공감과 설득과 위로와 도전을 위한 열정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눈빛이 빛나는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렵사리 얻어낸 새로운 방향의 길이 다시 되돌려지지 않도록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함이 때로 마음속에 싹튼다.


대선시기가 아니어도 딱딱한 정책에 대한 연설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철학을 공유하는 연설이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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