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단순한 질문은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하던 질문이다. 그 중에서도 더 치열한 질문을 고르라면 역사의 주체와 관련된 질문일 것이다.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내가 기록하면 그게 역사인데, 왜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되어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역사를 남기는 것, 다시 말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은 굉장한 특권 중 하나이다. 특히 전근대에는 역사를 남길 수 있는 지식과 문자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사회를 구성하던 구성원들이 모두 지식과 문자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에 기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끔 기록되기는 하지만 주인공인 왕에게 대드는 악역인 반역자나 반란군으로만 기록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나마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던 지식과 문자가 몇몇 특수한 조건 하에서는 평범한 이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지식과 문자가 전달된 근대에는 평범한 이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었는가? 아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훨씬 은밀하고 교묘한 형태로 주체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역사의 주체 자리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구성하는 ‘민족’,그리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차지했다.이 개념들은 소속된 사람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 구호를 실체화하기 위해 국가와 민족(보통은 민족국가라는 이름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민족은 있지만 국가가 없는 경우가 많았던 시기이므로 따로 적도로 하겠다.)은 이상적인 국민 상, 가정 상을 만들고 국민들이 이를 따르길 원했다.이를 위해 우리 민족, 우리 국가를 빛낸 위인들,애국자, 군인, 위대한 발견을 이룬 학자, 정치인 등 국가를 빛낸 사람들 중심으로 서술되었으며 교육에서는 국가를 빛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슈들을 중심으로 교과서를 만들어냈다. 이런 경향은 동서를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지되어 왔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은 외면하고 배제하였다.
그렇다면 근대 교육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사건이나 사람들은 없는 것이고 무가치한 것일까?그런 통념에 도전하고 국가 독점 역사서술을 비판하며 쓰인 책이 바로『한 뼘 한국사』이다. 이 책은 국가중심 역사책이 외면한 ‘낮은 곳에 있는 존재’, ‘금기시된 존재’, ‘국가경계 밖의 존재들’이라는 큰 테마 3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테마에 맞는 주제를 가지고 각 분야 전공자들이 소논문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점 두 가지가 있다.첫 번째, 책에 적힌 글들은 대부분 우리 근대사와 현대사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재미있게도 고대사 관련 주제도 같이 적혀있다는 것이다. 아직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선으로 그어진 근대적 경계도 없는 시대인데 국가 독점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다루는 한 사례로 짚어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두 번째는 ‘육남매 아빠의 중산층 가족 도전기’ 였다. 이 부분은 필자가 직접 친척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육성기록을 직접 얻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상을 그려냈다. 연구방법도 흥미롭고, 또 개인을 통해 국가와 사회상을 그려냈다는 점도 더욱 흥미로웠다. 이런 방식은 나중에 역사교육에서도 쓸 수 있는 좋은 교수법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전공자들은 국가 중심 역사서술이 외면한 사람들을 다루는 책을 써냈을까? 감춰진 것을 밝혀내고 싶어 하는 인간이 가진 변태적(?)인 심리(혹은 호기심) 때문일까?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왜 이런 책을 지금 출판하게 되었을까?
역사는 항상 동시대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학문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고, 2016년 국정농단 사태와 2017년 헌정사상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을 겪은 대한민국은 굉장히 혼란스럽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 혼란은 그동안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가치, 혹은 근대성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저자들은 시대에 맞춰 지금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수많은 이슈들, 그 이슈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온갖 형태의 혐오와 대립이 넘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역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 위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책 면면에 등장하는 주제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과거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우리가 겪는 현실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이름과 관련된 분석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현재 우리가 불특정 다수를 규정할 때 쓰는 언어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월남파병장교와 병사를 다룬 주제에서는 한국 군대라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여장남자는 성소수자 문제, 1925년 예천사건은 정규직 구직자들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있다. 공장 노동자를 다룬 주제는 툭하면 등장하는 귀족노조 프레임과 연결되어 있고 연변 조선인들과 낙랑 대방 사람들을 다룬 주제는 국가 경계 밖에 존재하는 이주 노동자들, 난민들을 바라보는 혐오적 시선과 연결된다. 종합해보면 이 책은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혹은 지금도 갖고 있는 욕망들 반대편에 존재하던 것들을 주제로 삼은 셈이다. 한국 사회와 구성원들은 금기시되던, 낮은 곳에 있는, 국가 국경 밖 소수자들을 역사적 그림자 속에 두고 국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국민 상을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육남매 아빠 김씨의 중산층 가족 도전기를 다루는 대상은 이상적인 국민 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거시적으로 근대국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국민 상을 달성하고 미시적으로는 잘 살겠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역사적 그림자 속에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서로를 핍박하고 짓밟고 배제하고 차별해 왔던 것이다.
국가가 제시하였던 고유한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한 욕망이 표출되고 있는 2018년, 아직도 마음속에는 근대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나라에 충성하고 중산층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 그 욕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국가 경계 밖에 있는 존재, 낮은 곳에 있는 존재, 금기시된 존재들은 혐오를 견디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는 다를 것이 없다. 국가 중심의 역사 서술은 나는 건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평범한 사람들)마저도 역사의 그림자 속에 위치시켰다. 이제는 우리를 옭아매는 중산층 신화, 애국자 신화에게서 떨쳐 나와야 할 때다. 그리고 우리 위에 절대 진리처럼, 신처럼 군림하는 국가주의, 근대 국가 그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고 온갖 혐오가 판치는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신화처럼 인식되고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