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촛불집회 이후, 한국은 지금 적폐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적폐 여부에 관한 논의도 없이 그저 상대방을 죽이거나 소멸시키는 것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안에는 교육계도 포함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교육부에서는 대학입시제도에 대한 개선방안에 대해 공청회를 실시했다. 시작은 좋았다. 고리원전 관련해서 나름대로 정부와 지역주민이 원만한 합의를 이룩했으니까. 하지만 대학 입시에 관한 공청회는 결국 정시강화, 수능절대평가로 결론 났다. 그리고 최근 터진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성적조작 사건은 내신에 대한 신뢰도를 내폭 낮추었다. 벌써 몇몇 기사에서는 정시가 강화될 것이라는 소망 같은 전망을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수능에 집중된 대학입시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수시이고 학생부 종합전형이다. 결국 그토록 욕한 수능 중심 입시지옥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많은 교육관계자들은 대학입시에 대한 문제점과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한다. 하지만 어떤 제도가 좋다, 어떤 모델을 가져와야 한다는 표면적인 담론만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교육의 본질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과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저 멀리 영국에서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필자처럼 의문을 머릿속에만 남기지 않고 직접 해머타운이라는 마을에 위치한 공립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연구했다. 그 후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학교와 계급재생산』이라는 책을 써냈다. 그는 왜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해머타운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연구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문에는 저자 또한 노동자계급 출신이라서 선정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 내용을 읽다보면 아마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좀 더 자세히 책 내용을 살펴보자. 저자는 해머타운 공립고등학교에 다니는 ‘싸나이들’이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물론 교사와‘싸나이들’과 반대 성향을 보이는 ‘범생이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어중간한 아이들, 교장 등 다양한 사람들과 면담 토론을 진행하기는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싸나이들’을 자세히 조명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해머타운에 사는 ‘싸나이들’에 더 집중하면 될 것이다. 다른 특징으로는 사회학 서적답지 않게 숫자나 통계, 도표 보다는 면담과 토론, 인터뷰를 가지고 분석하였다. 그렇다보니 간결하고 정돈된 느낌이라기보다는 조금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다. 실제 책 분량을 분석해보면 실제 저자의 정리, 결론부분은 적지만 인터뷰 내용과 그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이런 분량 배치를 통해 저자는 기존 교육사회학 분석에 비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다루고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다루면서 왜 도표와 숫자에 집착하느냐, 그 너머를 봐야 한다는 의도로 파악된다.
혹자는 이 사례와 파생된 연구는 영국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맞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마 저자가 한국에서 이런 내용을 연구한다면 연구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 나라의 학생들을 보며 책에 등장하는 ‘싸나이들’은 여기는 전부 ‘범생이들’만 모인 재미없는 곳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영국과 한국의 교육제도가 다름에도 왜 이 책을 읽고 이 서평을 쓰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간파와, 제약, 그리고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다루는 새로운 시선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인터뷰 하고 연구하면서 기계적 구조론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다시 말해 사회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주의는 영웅 서사시에 등장하는 악마나 게임에서 등장하는 최종보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한국교육에 대입해보자. 한국교육에서 만악의 근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은 대학입시일 것이다.한국의 교육 시스템, 아니 생애주기 중 가장 큰 분수령이 바로 대학입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대입은 인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오죽하면 수학능력시험을 잘 치르도록 경찰관이 데려다주고 직장인들 출근시간도 늦추고 비행기도 못 뜨게 한다.
그렇다면 대학입시를 바꾸거나 없애버리면 위와 같은 문제들은 해소되는가? 그것은 또 아니다.사람들은 공정한(?) 시험이 사라진 것에 대해 분노할 테고, 또 다른 사교육이 판칠 것이며 정책의 퇴행을 겪을지도 모른다. 아니, 교육적폐청산을 위한 공청회에서 내린 결론이 이미 보여주었다.
만약 기계적 구조론의 시선이라면 공청회에 참여하여 결론내린 사람들, 그것이 옳다 생각한 학생들, 공정한 시험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 모두 만 악의 근원을 파괴하지 못한 공범이 되는 셈이다. 또한 거기에 대한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운동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증명되었다. 교육운동 또한 그 동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더 소름이 돋는 부분은 진보주의자들이 실천하는 변혁의 움직임마저 이 사회 안에서 작용되는 움직임 중 하나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악이 자신의 장기를 사용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욕망을 분출하게 해줄 수 있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열어줬기 때문에 저자가 말한 ‘간파’와 ‘제약’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영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제도에서도 작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견고한 사회체제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분석과 비판이 중심이라 해결방안에 대해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 해결책도 원리적인 부분이 많다. 그만큼 저자도 답답함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에서 간파와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교육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이런 물음에 우리는 제도에 대한 고민보다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을 하며 답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이 옳다, 옳지 않다고 결정하지 말고 끊임없이 묻고 답하고 수정해야 한다. 사회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교육은 왜 하는지, 우리가 꿈꾸는 인간상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재설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재설정한 이상을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을지, 그 동안 해온 교육운동에 문제는 없었는지도 점검해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호로만 존재했던 ‘교육의 주체는 학생이다’라는 명제를 실체화시켜야 한다.그 동안 우리는 학생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지도했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에게 더욱 다가가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어야 한다. 주체로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우리가 사회 속 주체로서 온전히 설 때, 더 이상 구조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