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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망 Nov 20. 2020

안경을 쓰기로 했다.

더 멀리 보이는 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안경을 쓰기로 했다. 부쩍 시력이 나빠지면서 일상생활에도 불편함이 찾아왔다. 책상 서랍에 오랫동안 방치한 만 원짜리 뿔테 안경을 꺼냈다. 조금만 써도 콧등에 얄팍한 매가 종아리에 남긴 선처럼 빨갛게 아프다. 할 수 없이 휴지를 여러 번 곱게 접어 콧등과 안경 사이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 두 달 전에 큰맘 먹고 동네 안경점을 찾아갔다. 몇백 개의 안경이 나열된 가운데 내가 원하는 건 가볍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자연스레 티타늄 소재로 눈이 갔다. 몇 개의 후보군을 정해놓고 우왕좌왕 마음을 못 정하다 결국 하나를 집어냈다. 아직 안경 쓰고 다니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 빼곤 다 마음에 드는 안경이다. 정말 다행이다.  

   

안경을 쓰고 밖을 돌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 세상은 수채화처럼 뭉개진 색들의 향연이었다. 사람과 약 5m만 떨어졌다 하면 그들 얼굴이 달걀귀신처럼 살빛 덩어리로 보였다. 덕분에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이리저리 치이는 곳이 아니면 나는 사람들 시선에서 해방되는 무인지경의 기분에 놓이기도 했다. 가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조금만 거리가 있어도 사람 얼굴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초점을 모으려고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반쯤 구겨가면서 상대를 지긋이 쳐다보는데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그 표정이 코앞에 와서야 눈에 들어온다. 내 잘못이다. 하하. 한번은 알바 하다가 들은 말인데 내가 자기를 계속 쳐다봤다는 것이다. 나는 흐릿한 시야가 익숙해 있어 멀리 있는 사람을 배경의 한 요소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멍을 잘 때리는 나와 상대방 눈이 안 보여 눈 맞춤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겹쳐 벌어진 해프닝인 것 같다.     


안경을 쓰고 좋은 점이 있다면 단연 주변 풍경이 눈에 곧잘 들어온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집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꿈에도 몰랐다! 요즘 머리를 식힐 겸 자주 산책하는 편인데 머리 위로 하늘에 걸린 단풍이며 땅을 구르는 갖가지 빛깔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실은 살면서 단풍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름이며 강, 산책하는 강아지까지 눈알이 끝까지 돌아가다 못해 똑딱 박히도록 곧잘 쳐다보게 된다. 이렇게 또 다른 오해를 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계절이 오고 감을 느끼는 사람은 내면이 평화롭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빨간 단풍, 거뭇거뭇 검붉은 단풍, 노오란 단풍, 칙칙하게 말라비틀어진 단풍. 바닥에 늘어진 색깔 꾸러미를 보며 내 마음의 색을 맞춰본다. 아니, 내 마음이 그 위를 뒹굴며 카멜레온처럼 물들어간다.     


안경을 쓰고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성난 구름 사이로 빼꼼 마음이 화창해졌다. 시야가 모호할 때는 나 말고 달리 관심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밖을 성큼성큼 걷는 동안 나의 주 관심사는 옷에 묻은 먼지나 보풀, 그나마 눈썹 위로 찰랑찰랑 흔들리는 머리카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습관처럼 더 깊숙한 안쪽으로, 마음의 문제에까지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나 자신과 한바탕 씨름하고 언제 한 번이라도 개운한 적이 있었던가. 달아오른 머리를 부여잡고 그렇게 망가진 하루가 셀 수 없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마음을 데이기 십상이다.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안경을 쓴 지금은 시야가 확 트였다. 트이니까 내 세계도 넓어진 걸 느낀다. 넓어진 만큼 자신을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보다 내 주변에 좀 더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안경을 쓰고 나니 요즘 재미를 붙인 테니스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전에는 온통 좋은 자세를 만드는 데에만 신경이 쓰였다. 코트 위의 트로피가 된 것 마냥 누구보다 멋진 자세로 공을 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공을 주고받는 랠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 수밖에. 하지만 안경 테두리 안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나는 전환점의 실마리를 찾았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이나 사람들의 웃는 표정, 테니스장 주위를 감싸고 있는 단풍나무들.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힘을 너무 주고 있었다. 왜 인간은 항상 잘하려고 하면 힘을 너무 들이게 되고 즐기려고 하면 더 잘하게 되는 걸까. 실력이 훨씬 늘었다! 인간의 생리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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